Day 9. 닻

by MoonA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나선다. 이번 여행, 길 위에서 새벽을 맞이하는 마지막 날이다.

오늘 새벽의 색은 참 오묘하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자니, 멍함을 허하지 않는 보랏빛 기억들이 타래를 푼다.

대학교 때 유행하던 립스틱 색 같기도 하다. 펄이 잔뜩 섞인 밝은 보라부터 와인에 입술을 한나절 담구고 있었나 싶은 진한 보라까지, 화장품 가게마다 넘실대던 그 색들. 포스터 속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보라색 입술로 행인들을 노려보며 속삭였다.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내 머릿속은 이미 요즘의 AI가 그려낸 듯한 '환상 속의 나'를 재생 중이다. 이 순간만큼은 상상 속의 나와 현실의 내가 괴리 없이 겹쳐진다.그렇게 주머니를 털어가는 이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니 그때 보라색 입술이 찍힌 내 사진이 온라인에 떠돌아다니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불행이라고 해야하나. 이불킥 할 유물들이 남아 있지 않은건 다행이고, 그걸 보고 웃을 기회가 사라져 없는 건 불행이고.


이 보라색 아침을 보며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던 날들도 떠오른다. 퇴사과 입사 사이, 이력서의 결과를 기다리던 초조했던 한 달, 오전엔 편의점에서, 오후엔 맥주집에서 파트타임 일을 했던 적이 있다. 가끔 자정 너머까지 가게에 남는 날이면, 맥주 냄새와 골뱅이 통조림 국물 냄새 가득한 창 너머로 동트기 전 지금과 같은 보라색 하늘 아래 하루를 누구보다 일찍 시작하는 이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는 사람, 자꾸 내려가는 스타킹을 추스르며 걷는 사람, 주머니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급히 줍는 동안에도 다리를 멈추지 않는 사람...그들 사이로 밤새 취기에 절어 고주망태가 된 이들이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가게 안에 있었다. 그들의 우열을 나누어 평가하던 그때의 내 마음도 떠오른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둔 그들의 사연은 태평양을 유영하는 물고기 종류만큼이나 다양했을 것일진데. 여전히 흑백으로 갈라지는 생각들은 경계대상이지만 그땐 지금보다 좀 더 흑과 백이 선명했던 머릿 속이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던 그녀의 방에 처음 초대받았던 날이었다. 집을 떠나야 할 이유도, 스스로 집을 구하는 법도 몰랐던 나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어설픈 팔다리를 어찌할 바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재혼한 아버지의 집에서 스스로가 '짐'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독립을 선택했던 스물 다섯의 그녀. 깔려있는 이불 위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녀의 한 줌 가느다란 허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보다 더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집어드는 그녀 앞에서, 그녀가 겪은 일들이 얼마나 아팠을지 가늠도 하지 못했던 스물셋의 나는 고작 생과일주스 가게에 내가 좋아하는 망고 주스가 없다는 식의 투정을 부렸고 그녀는 언제나 그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잘 살고 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매일매일 아픔을 한스푼씩 덜어 발 디디는 곳곳에 묻었다. 지금의 나는 혹시라도 그때보단 조금 성숙해진 내가 그녀에게 필요할 땐 꼭 있어주리라 하며 자주 안부인사를 전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아픔이라 할 만한 과거가 전혀 없다는 사람을 만나면, 급하게 채운 맥주잔의 거품처럼 질투가 훅하고 올라와 화들짝 놀랄때가 있다. 그 마음을 들킬까 봐 고개를 젖히고 요란하게 웃곤 하는데, 상대는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반지하집 안방 유리창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던 물처럼 올라오는 질투를 다루는 방법은 단 하나, 나를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런 것들을 깨우쳐가는 나이듦이, 이럴땐 참 좋다. 어제 본 드라마에 나왔던 턱선이 무척 고운 남자배우가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것과 같은 소소한 비극도 있지만 말이다.


때론 구멍난 우산이나 배터리없는 손전등을 들고 있을때도 있지만, 언제나 의지가 되어준, 지금 옆에 있는 운전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슬쩍 스쳐본다. 최대한 무심하게. 내가 뭘 깨달은 것을 눈치채면 좀 부끄러우니까.


보라색 하늘이 물러가고 주황색 하늘과 주황색 가득한 Paige, AZ 에 진입한다.

물이 부족한 California, Arizona and Nevada 같은 주에 물을 공급하기위해 1960년대에 지어진 댐들 중 하나이다.

이곳은 콜로라도강 위로 웅장하게 형성된 사암 언덕에 지어진 'Glen Canyon Dam' 이다. 대자연의 멋진 풍광 속에 굳이 인공 구조물을 세웠어야 했을까 싶다가도, 물 한 방울이 간절한 이웃 주들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안 멋진' 장소를 찾기도 힘들었겠지 싶어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로 한다.

댐의 반대쪽

Flagstaff, AZ 의 카페 'Single Speed'에서 원두를 좀 샀다. 커피맛은 여전히 잘 모르지만 아주 가끔 눈이 커지는 맛이 있기도 하는데 여기 커피가 그랬다. 신맛이니 과일맛이니 쓴맛이니 뭐 그런 미사여구로 묘사할 수준은 여전히 안되지만 말이다. 지나간 시간을 곱씹어볼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 커피를 추가했다.





익숙한 풍경의 동네 어귀에 들어선다.


만남과 헤어짐, 설렘과 서운함이 반복되던 감정의 파고가 잔잔해진다.

항구에 도착했다.

닻을 내린다.


길 위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이 쉬이 잊히지 않게 챙겨온 향과 맛과 기억들을 오감에 눌러 담는다.


언제나 그렇듯 돌아오자마자 다음 여행지를 논하지만, 곧 일상의 리클라이너 의자에 몸을 맡길 것이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습관이나 뒤집을 수 없는 일상은 없다.

때가 오면 미래의 내가 엉덩이를 떼면 될 일이다.

그러니 몸이 너무 안락한 집에 익숙해져서

다시는 떠나지 않게 될까 걱정하지 말자.

지금은 또 매일 똑같아서

안심인 일상을

온전히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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