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기 전,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가득했던 E와 S는 그들을 제외한 모두가 예견한 대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아주 작게는 오래 사용한 책가방을 바꾸는 일부터 학교를 옮기는 일, 회사를 옮기는 일,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까지. 크고 작은 변화들은 언제나 기대와 두려움, 후회 같은 감정을 동반한다.
멈춰 있는 것은 계속 멈춰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나아가려 하는 관성의 법칙은 우리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새로운 시작이 설레는 만큼 두렵다 해도, 지금 이곳이 결코 최종 정착지가 아님을 안다. 결국 사람이 사는 곳과 사람이 하는 일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응'이라는 아름다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처음의 걱정들은 대개 별거 아닌 일이 되고, 익숙해진 몸과 마음은 이내 또 다른 무언가, 혹은 다른 어딘가를 꿈꾸기 마련이다
도로시가 뒷굽을 두 번 두들긴 듯, 눈 깜짝할 사이 우리는 새로운 곳에 와있고, 예상했던 어려움들을 잘 헤쳐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삶인 듯하다.
고작 1박이냐는 S의 아쉬운 인사를 뒤로 하고, 하늘 가득 이불처럼 구름이 펼쳐져 있는 길을 나선다. 저게 이불로 보이는 걸 보니 아직은 더 자고 싶은 마음이지 싶다. 하지만 오늘도 갈길이 멀다.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애리조나 입성 일정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또 가야 한다.
로드트립에서 아이다호를 지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2011년이었다. 생애 첫 미국 로드트립이었기에 도저히, 도무지 잊히지 않는 생생한 기억들이다. 오레건 주와 아이다호 주 사이의 경계를 만드는 스네이크 강 위로 협곡을 따라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도로가 끝이 안날 것 같았던 기억, 한여름 여행에 숙박비도 아낄 겸, 꽤 많은 날들을 캠핑으로 다니던 중, 폭포가 흐르는 협곡을 마주한 캠핑장에서 머물렀던 기억, 그 밤에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을 보고 싶었지만 술을 과하게 마시는 남편이 꼴 보기 싫어서 오기로 텐트 안에 있었던 기억... 참 어리고 예쁘고, 그래서 못났고 철없던 많은 기억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갈 길은 멀고 바쁘지만, 약 14년 전 우리가 들렀던 몇 군데를 들려가기로 한다.
화장실도 가고, 기념 자석도 살 겸 들어갔던 ‘Thousand Springs State Park Hagerman Fossil Beds National Monument Visitor Senter'
'Hagerman Fossil Beds'는 약 350만 년 전, 북미 대륙을 누비던 고대 생명체들의 흔적이 박제된 '지구의 일기장' 같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대 말의 직계 조상인 Hagerman 말들이 이곳에서 수백 마리의 화석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상해 본다.
미국 대륙에 인류가 나타난 것이 약 1만 5,000년 ~ 2만 3,000년 전이라고 하니 수백, 수천 마리의 말들이 인류의 속박없이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뛰어다녔을 초원을.
이곳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말들은 대개 물가 근처에서 한꺼번에 발견되었고, 포식자에게 잡아먹혔다기보다는, 가뭄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집단 고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가뭄으로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울타리와 주인이 속박하는 삶?
울타리와 속박하는 주인은 없지만 가뭄이나 포식자들에게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삶?
답이 정해진 듯 하지만 또 답해놓고 내 대답이 맞나 갸우뚱하게 되는 질문들이지 싶다.
2011년에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던 I.B. Perrine Bridge. 생에 마지막일거라고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담아뒀던 장관이다. 돌고 돌아 또 올 수 있을거라는 걸 몰랐던 내가 십수년전의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모습은 조금 낡았지만 같은 기분으로 돌아왔다.
스네이크 강 협곡 위로 세워진 미국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이 다리는 별도의 허가 없이도 1년 내내 BASE 점핑이 가능한 전 세계 유일한 구조물로 알려져 있어, 운이 좋으면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다.
로드트립을 하다 보면 지루하게 이어지는 광야와 초원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문득 산, 초원, 나무, 바위들이 숱한 세월 지켜보았을 세상의 변화에 대해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각기 다른 지형과 겹겹이 쌓인 지층들에 담긴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열렬히 좋아했던 지구과학 선생님이 미국에서 지층 연구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이곳을, 혹시 저곳을 다녀가셨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내가 지질연구학자라면 방금 내 발에 차인 돌멩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아이다호를 지나, 유타주에 진입한다.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적힌 커다란 전광판이 눈에 들어온다.
Trump Again 2028
유타의 정치성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구이다.
어딜 가나 오래된 로컬 햄버거집은 있기 마련. 입맛 까다로운 남편과 다니다 보니 거의 실패 없는 햄버거집을 주로 검색하게 되는데, 유타에는 'Crown Burgers'라는 1978년 설립된 이래 유타를 상징하는 햄버거 체인이 있다. 이곳의 주인공인 '크라운 버거'는 소고기 패티 위에 훈연 향이 배어있는 파스트라미를 쌓아 올린 버거라고 한다, 그리스계 가족이 운영하는 덕분에 정통 자이로나 수블라키 같은 그리스 요리도 주문할 수 있다. '프라이 소스'라고 불리는 소스에 감자튀김을 찍어먹는데, 우리가 아는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은 그 색과 맛이다. 기억하자. 내가 이게 맞나하고 쭈삣거리는 사이에 그걸로 대박내는 사람들이 있다.
매우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매우 유물스러운 계산대가 마련되어 있는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유타는 몰몬교의 성지이고, 많은 성전들 중에 주도 솔트레이크 시티 중심에 있는 Salt Lake Temple 성전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가 갔을 땐, 공사 중으로 입장이 불가능한 상태. 입장이 가능하다 했더라도 일정상 스치듯 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유타의 솔트레이크 시티는 몰몬교보다는 쇼트트랙 미국국가 대표선수였던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더 각인된 곳이다. 당시 미국인 영어강사와 함께 영어학원에서 강사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건을 두고 펼쳤던 그와의 설전도 기억난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일에는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있더라.
유타의 석양을 바라보며 유타와 애리조나가 만나는 경계선 어디쯤에서 숙박을 하기로 한다.
Beaver, Utah가 바로 그곳.
이곳에는 The Creamery라는 1952년부터 이어져 온 역사의 낙농 제품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 왔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치즈 커드를 비롯해서 24가지 이상의 아이스크림도 유명하다. 매장 내부에 마련된 젖소 짜기 체험 공간과 현대적인 인테리어 덕분에 하루 종일 차 안에 있던 피로가 위로를 받는다.
지도만 들여다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면, 숙박지에서 가까운 편의점에서 물이나 사오고 말았을 일정이었을텐데,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정보들 덕에 이렇게 어두운 밤에도 숨겨진 보물들을 쉬이 찾을 수 있어 좋다.
어쩌면 이곳도 처음 영업을 시작했던 1952년엔 이렇게 외부인들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찾아올 날이 올 거라고 알지 못했을 일일테다.
오늘밤이 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달달한 아이스크림으로 충전한 몸이 좋은 꿈을 가져와 주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