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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Nov 13. 2020

박의 방황

박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도, 엊그제도. 한 일주일쯤 되었나보다. ‘오늘은 나오겠지.’에서 ‘이 인간 제 정신인가?’ 싶은 벅찬 걱정마저 들려던 찰나, 강의실 뒤에 앉아 웅성이는 남자애들 목소리가 들린다.


“시형이형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며? 미쳐 가던데?”

“어. 지난번에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더만, 이번엔 진짜인가 보네.”

“수업도 안 나오고, 하루 종일 쳐 담배피고 컴퓨터 게임만 해. 인생 다 산 것 같이 굴더라.”


박과 김은 오랜 연인 사이었다. 입학식부터 CC였던 건 아마 그들뿐이지 않았나 싶다. 나와 또래의 우리는 서로를 탐하기 바빴다. 스치는 거의 모든 남학생을 스캔하고, 또 스캔했고, 나 또한 걷고 앉아 있는 내내 스캔 당하고, 또 스캔 당했다. 연애거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박과 김은 달랐다. 인생이 연애 중이었다. 입학도 하기 전 09학번 신입생 카페에서 만나 미리 사귄 건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포스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딘가 설익은 관계 대신 시간으로나 살 수 있을 법한 친숙함과 진득함이 그들에게 있었다. 3년차 커플의 모습이 그러했다.


“오빠야, 내 오늘 수업 1시에 끝나거든. 이따 여기서 만날래?”

“알겠디. 이따 연락하께. 수업 잘 들어래이. 졸지 말고!”

“키키. 오야. 이따 봐!”


보기보다 더 깊은 커플이었다. 부산 김이 고등학교 1학년, 부산 박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둘은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다 고3이 되고, 김과 박은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약속 한다. 떨어지지 말자는 약속이겠다. 1년 선배이던 박은 수능 대참사를 맞아 이곳에 오지 못할 뻔 했는데, 김과의 약속을 위해 재수를 하게 된다. 김에게 보여주는 사랑이었겠다. 그리하여 지금, 같은 학교 신입생이 된 둘이 여기 있다. 어울리지 않게, 또 어울리던 둘이다.




박은 나와는 절친한 동기사이다.

우린 공대생이다. 남의 비율이 여의 비율을 압도하는 곳이 여기다. 때문에 여자애들의 “공대 아름이” 놀이가 판을 치는 곳이기도 했다. 보통의 남자애들과 달리 이를 질색했던 게 박인데, 덕분에 그냥 “공대생”으로 살아가는 나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박은 가끔 내게 “공대 아름이들”을 욕했다.

개념은 겁나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막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 살던 박이, 나는 좋았다. 우리는 별것 아니나 남들 크게 여기는, 그리하여 우리에겐 별 것 아닌 게 되는 일을 풍자하며, 시시할 정도로 하찮게 여기며, 서로에게 “미쳤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박과 떠드는 시간만큼은 세상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박이 있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나의 행님이 되었다.


그런 우리를 김은 아니꼬와했다.

나는 박과의 수다를 즐거워하면서도, 그를 이성으로 본 틈이 단 1초도 없다. 감정이 말한다. 감정 따윈 없노라고. 우리 대화만 들어도 알 수 있을 테지만, 학과 커피 자판기 앞 낄낄대던 우리만 보고 멀리 있던 김은 분노했다. 물론 나 말고 박에게. 박은 말하지 않았다. 공연히 나에게 실례가 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겠다. 박의 상식에도 김의 질투가 지나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김은 질투가 많은 여자였다. 때문에 박은 여자인 사람과 인사, 대화, 그 밖에 무엇을 하건 김으로부터 질타를 받았고, 김은 삐쳤고, 박은 달래 주어야 했고, 이와 같은 날의 3년 반복이라, 했다. 그리고 이번엔 나 때문이었다. 과하다 싶은 김에게, 미안하다고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박에게 미안했을 뿐인데, 그런 내게 박이 말했다.


“괘안타. 혜영이가 원래 착한데, 이런 부분에 많이 예민타. 괘안타. 내가 또 잘 달래주면 될끼다.”


풀린 줄로 알았다. 3년을 어르고 달랬으면, 이번도 잘 풀 거라 생각했다. 박과 김이 헤어질 줄은, 몰랐다.

다행인지 뭔지 나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다툼의 이유는 같았다. 질투가 극대노에 달한 김이 헤어짐을 통보했다. 무렵으로 김의 싸이월드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흰 바탕만 보여 아무 것도 써놓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반전이라면 글자색 “흰 색”으로 설정 후 워딩해 놨다는 거다. 바탕 일부를 드래그 해보니, 검정 바탕으로 흰 글이 보였다.


“이젠 정말 끝이야.”


박은 미쳐갔다. 타격이 심-하게 컸던 것 같다. 헤어짐의 보통 맛쯤은 알고 있었지만, 박은 헤어짐의 핵불닭 맛쯤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수업에 나오지 않았고, 밥 대신 담배 연기를 먹었고, 간신히 숨만 달고 살았다. 애들이 말했다. “시형이형 이러다 죽겠던데.ㅋㅋ”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초죽음상이겠구나’ 예상했던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비장함이 보였다. 잃을 게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의 힘이 느껴졌다.


“내 괘안타. 뭐, 그런기지 뭐.”




그때로 박은 정처와 마음을 두지 않고, 떠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를 만났다. 평소 박에게 이성적 호감을 표하던 여자였다. 감정 없이 만났고, 때문에 날것 없는 본인의 추함만 보이다 연애가 끝났다. 단숨에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다시 만났고, 또 만났다. 짧게, 가볍게, 동시에. 5년을 넘게 지속했다. 박의 방황은 오래갔다.


방황의 옆엔 내가 있었다. 지켜 본 자로써 말할 수 있는 거지만, 그때만 할 수 있는 일을 박은, 그때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때만 했다. 젊은 날, 후회란 없을 것 같은 박이었다. 아마 박이라 가능했던 일일지 모른다. 나는 조롱하듯 말했다.


“오빠, 오빠 얘기 글로 써도 되요?ㅋㅋㅋ”

“어허이.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이. 와이프가 알면 내 죽는다.ㅋㅋㅋ”


박의 방황을 4줄 정도만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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