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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떠난 하노이(9)

진탕 마시는 탕진의 둘째 날 밤

by 슈히

가장 일정이 빠듯했던 하노이 둘째 날의 밤이 드디어 저물었다. 빡빡한 일정에 시달린 지친 육신에게 휴식을 주고자,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어젯밤부터 가려고 점찍은 곳이 있었다. 업장 입구 밖에는 손님들의 신발들이 즐비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발 관리를 받는 손님들이 보였다. 직원이 호객 행위를 했으나, 첫날부터 마사지를 받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서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 장사 잘 된다. 관리 잘하는 곳인가 봐!"

"우리도 내일 일정 마치고, 가보자!"

평소 국내에서 전신 안마를 받고 있으나, 요통이 심할 때 전신 자극을 받으면 오히려 역효과일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가장 저렴하고 부담이 적은 발 마사지를 선택했다. 30분짜리와 60분짜리 관리가 있었는데, 60분은 할인가였다. 그러나, 우리는 30분을 받았다. 굳이 과소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얼핏 여사장의 표정을 보니,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내 긴 바지를 입고 있어서, 갈아입을 편한 옷이 필요했다. 40대 여성이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좁은 층계를 올랐다. 여자는 내게 상하의를 건넸다. 내가 전신 관리를 받는 걸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전신 아니고, 발 관리만 하려고요."

내가 설명하자, 그녀는 그제야 이해한 듯 보였다.

10대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다랑을 담당했고, 40대 여성이 나를 맡았다. 아가씨는 짧은 머리칼에 조끼 차림이었고, 팔에 문신이 있었다. 얼굴이 통통하고, 복스러운 인상이었다. 개성 있었다.

'미소년 같네. 여성스럽게 꾸미면 예쁠 것 같은데, 왜 남자처럼 하고 다니지? 사내가 되고 싶은 모양인가.'

업체 간판에는 한국어로 베트남 전통 마사지라고 쓰여있었다. 다랑이 신음 소리를 내자, 아가씨가 '아파?', '괜찮아?'하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한국어는 그게 전부였다. 간판을 미루어보아 한국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업소인가 싶었는데, 직원들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진 못했다. 40대 직원과 여사장은 특별히 한국어로 말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한 쪽당 15분씩 종아리와 발을 주물렀다.

"나, 발 관리 처음 받아 봐."

다랑이 말했다.

"정말? 여태 뭐 하고 살았니! 몸 상한다. 돈 좀 쓰고, 관리 좀 받고 살아."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시원하네. 내일은 60분 관리받아보자."

다랑은 마사지에 만족한 듯 보였다.

"누나한테 쓴 흰색 크림이 아마 더 좋은 제품인가 봐."

그가 넌지시 말했다.

"아, 그래? 왜?"

"코코넛 크림 같은데, 질감이 훨씬 부드러워."

직원이 처음엔 노란색 크림을 사용하다가 흰색 크림으로 바꿔서, 다랑의 종아리와 발을 안마했다. 짧고도 아쉬운 30분이 지났다. 마지막 일정인 칵테일 바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 음주였다.

"상호가 뭐야?"

"레오의 터번."

가상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신비로운 상호였다. 도착하자, 금발의 남자가 우리를 환대했다. 키가 작고, 장발이라서 처음엔 여자인가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가 확실했다. 빈 좌석은 하나뿐이었고, 일단 거기 앉아서 칵테일을 주문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창작 칵테일들이 많았다. 구미가 당겼다.

우리가 앉은자리가 입구와 화장실 쪽이라서, 손님들의 왕래가 잦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 테라스에서 손님들이 빠져나가길래 자리를 테라스로 옮겼다. 밤이 되니, 기온이 서늘했다. 반소매, 반바지 차림인 다랑은 한기를 느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다행히 긴소매, 긴바지를 입었다.

"아, 이래서 술 마셔도 하노이 날씨가 춥다고 했군."

첫 번째 칵테일은 다랑이 Citrine Quartz, 내가 The Last Fairy를 주문했다. 직원이 다가와 현재 할인 시간이라서, 클래식 칵테일을 주문하면 할인해 주겠다고 설명했다. 늘 새롭고 특이한 것을 선호하기에, 변경하지 않았다.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걸, 마시고 싶어."

다랑이 선택한 칵테일이 내가 고른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게다가, 잔도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잔 예쁘다! 비싸겠지?"

특이한 모양의 고급스러운 술잔을 볼 때마다, 갖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하지만,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터라 사봤자 안 쓸 것을 알기에 사지 않았다.

두 번째 칵테일은 다랑이 Matador, 나는 Daisy Dream를 마셨다. 그때부터 슬슬 취기가 올랐다. 다랑은 도수 높은 강한 술을 선호해서, Daisy Dream을 시시하게 여겼다.

"이건 술 같지도 않네. 그냥, 음료잖아."

"아무래도 여자들은 도수 낮은 약한 술 선호하잖아. 이름부터 소녀 취향이네. 데이지 꿈이라니, 동화 같다!"

흰색 칵테일 위에 말린 데이지꽃 한 송이가 동동 떠있었다.

"물가 진짜 저렴하다! 반값도 안 되네. 남는 게 있을까?"

다랑이 감탄했다.

"이제 마지막 잔 시키자. 숙소 가서, 어서 자야지. 나 취했어."

흐느적거리며, 다랑에게 기댔다. 그는 멀쩡했다.

"마지막이니까, 누나가 원하는 거 마실게."

"그래? 뭐가 좋을까......"

차림표를 신중히 살피며 고민했다. 마지막 잔으로 Valley Sheep과 Corrupted Fairy를 선택했다. 주문이 밀렸는지, 한참 기다려도 칵테일이 나오지 않았다. 내내 관찰한 결과, 이곳은 현지인들보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 같았다. 특히 서양인 손님들이 많았는데, 혼자 온 고독한 서양 남자도 보였다.

"여기 장사 잘 된다. 고객 층도 다양하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있었고, 친구 관계인 것 같은 서양인 남녀들, 선후배 사이로 예상되는 남자 두 명 등 많은 이들이 왔다 갔다. 우리는 세 잔씩 총 여섯 잔을 마시느라 꽤 오래 머물렀다.

"칵테일이 특이해서 좋은데, 경치는 꽝이네. 조망이 없어. 답답하군."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건물이 붙어 있고, 맞은편 건물은 수선집이었다. 우리의 이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칵테일잔을 촬영하는데, 배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맙게도, 직원이 촛불을 밝혀 갖다 주었다.

"낭만적인 시간 보내세요!"

"와, 고맙습니다!"

내가 촬영하는 동안, 다랑이 팔을 뻗어 바람으로부터 촛불을 지켰다. 조명은 곧 꺼지고 말았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마지막 칵테일들이 나왔다. Valley Sheep은 유리잔 겉면에 라벤더 씨앗이 붙어있었다. 여태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롭고, 신기한 장식이었다. 또, Corrupted Fairy를 통해 corrupt라는 단어를 익힐 수 있었다. 유익하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윽, 과연 타락한 맛이다! 이것 좀 마셔봐."

"헉, 치약맛이네. 양치 안 해도 되겠다!"

박하의 맛과 향에 압도된 채 치명적인 밤을 보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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