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영월, 단종과 할미꽃의 눈물(9)

노루귀, 할미꽃 그리고 칠족령

by 슈히

우리들은 점점 지쳤다. 산행 거리가 생각보다 길었고, 할미꽃을 기대했으나 꽃도 안 보였다. 혹시 절벽에 몰래 펴있는 걸 못 보고 지나칠세라 염려하며 기웃거렸으나, 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앞서 가던 회원들이 꽃을 발견하고 알려줬다.

"이게 할미꽃이에요?"

"아뇨, 이건 노루귀라는 야생화예요."

산행 오기 전에 검색한 블로그에서 같은 모습의 사진을 봤는데, 실제로 보니 참 반가웠다. 할미꽃을 보는 게 목적이었으나, 노루귀를 발견한 것도 큰 기쁨이었다. 노루귀는 키가 매우 작아서 자세히 보려면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 했다.

노루귀에게서 잔잔하고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흰색은 청초하고, 보라색은 신비로웠다. 마치 노루의 귀 모양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노루귀처럼 생기진 않았다. 다만,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을 만한 꽃이라고 생각했다. 암술은 납작했고, 풍성한 수술은 마치 족두리의 장식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난생처음 본 야생화의 모습에 마냥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야생화를 처음 본 곳도 강원도였다. 무더위에 삼척 덕항산에서 동자꽃을 본 적이 있다.

노루귀의 줄기에도 할미꽃과 마찬가지로 흰 솜털이 가득했다.

'추운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해 털을 지니고 태어나는구나. 신기하다!'

동강의 경치를 감상하며 하산하는데, 계단을 내려오자 좌측에 등산객들이 몰려 있었다. 바로 그곳에 할미꽃이 절벽에 피어있었다. 어쩜 위험한 절벽에서 꽃이 피는지, 감탄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할미꽃이랑 같이 사진 찍어주세요!"

운영진에게 부탁하자, 그가 응했다.

"누가 꽃이게?"

활짝 웃으며 장난쳤으나,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느 게 꽃인지, 너무 분간이 잘 되는데요."

민망해서 혼났다.

할미꽃을 자세히 관찰했다. 흰 솜털 속에서 자주색 꽃받침이 먼저 자라는데, 그 모습을 단체 대화방에 공유했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병아리 발가락인 줄 알았어요!"

"다람쥐 발가락인 줄 알았어요!"

장차 할미꽃이 될 식물인 걸 알고 있었기에, 그걸 알지 못한 이들의 감상이 재치 있게 느껴졌다.

동강 자생 할미꽃은 이름만 할머니이고, 전혀 노인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기존에 알던 자주색의 고개 숙인 할미꽃과는 달리, 동강 할미꽃은 꽃잎의 모양이 백합과 유사했다. 진노란색 수술이 풍성하고, 중앙의 자줏빛 암술이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있다. 줄기에는 흰 솜털이 부숭부숭 나있는데, 털북숭이 설인 같은 인상을 자아냈다.

'할미꽃이 아니라 '아슬아슬 여왕꽃' 아니야?'

마침 동강 할미꽃의 꽃말은 '절벽의 여왕'이라고 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꽃을 피웠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칠족령을 거쳐 하산했다. 칠족령이 뭔지도 모르고 갔는데, 절경이었다. 산행 도중 본 동강은 우거진 나무가 시야를 가려서 답답했는데, 칠족령은 전망대가 있어서 비교적 조망이 좋았다. 마을을 안고 둥글게 돌아가는 산세와 굽이치는 물결, 울창한 소나무숲과 절벽 아래 펼쳐진 자갈길을 바라보며 마음을 정화했다.

여자 회원 한 명은 힘들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칠족령은 볼 필요 없고, 사진으로 보겠다며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실물을 보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웠다. 이곳은 영월 동강댐 건설 계획이 백지화됨으로써 보존될 수 있었던 곳으로, 석회암 지대의 특성과 굴참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활엽수 등 천연 식생의 풍요로움으로 동식물의 다양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떠올리니, 풍경이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칠족령은 정선 제장마을에서 평창 문희마을로 넘어오는 고개라고 한다. 옛날에 옻칠을 하던 선비의 집 개가 발에 옻 칠갑을 하고 도망갔고, 그 자국을 따라가니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의 풍경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후 옻칠과 발을 의미하는 칠족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칠족령에 대한 안내문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회원들이 안 보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아니나 다를까, 못 보고 그냥 오길래 내가 외쳤다.

"거기 안내문 읽어 보세요!"

"개 덕분에 발견한 곳이네요."

칠족령을 보지 않은 여자 회원과 재회했다. 내가 회원들에게 요청했다.

"칠족령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세요!"

"아, 뭐였더라?"

"다시 가요, 다시 가!"

하산 후, 화장실에 들렀는데 등산 스틱을 두고 온 모양이었다. 여성 회원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스틱 잘 챙겼어요? 화장실에 빨간색 스틱 한 쌍이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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