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나는 내가 게스트 하우스를 연다면 딱 비야 마리(Villa Mary) 같은 숙소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콜롬비아의 북부에 타강가라는 마을이 있다. 카리브해에 면한 어촌 마을로 크기는 고작 1킬로미터 평방 남짓. 놀랍게도 이 협소한 촌락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 루트, 일명 ‘그링고 트레일’에 제 이름을 올렸다. 저렴한 물가와 경이로운 해저 환경이 이곳을 다이빙의 성지로 성장시킨 덕분이었다. 그링고란 외국인 관광객들을 조소적으로 일컫는 라틴아메리카식 표현. 나도 검은 머리와 찢어진 눈을 한 조금은 특이한 그링고를 자처하며 타강가에 왔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내가 사랑한 숙소 비야 마리를 만났다.
비야 마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행자 숙소(‘Posada turística’)라고 크게 적힌 샛노란 색 단층 건물이 마을의 어느 지점에서든 눈에 띄었다. 물론 도드라진 외관이 아니었더라도 이곳을 찾는 데 애를 먹은 방문객은 없었을 거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비야 마리?” 한 마디만 외치면, 숙소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친히 에스코트까지 해줄 작고 인심 좋은 부락. 아무래도 타강가에선 길을 찾는 것보다 길을 잃는 것이 몇 갑절은 더 어려울 성싶은 것이다.
샛노란 외벽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숙소의 내벽은 한층 다양하고 강렬한 채색을 띄었다. 내가 묵은 다인실의 바닥은 새파란 색. 갓 청소를 마친 듯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 바닥 위로는 도합 열 개의 침구가 서로 다른 원색의 이불에 덮여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공용 공간으로 나가면 그 현란함은 배가 됐다. 이쪽 벽면은 하늘색, 저쪽 벽면은 노란색, 또 어떤 벽면은 청록색. 가구와 소품들도 무엇 하나 통일된 색상으로 조합된 것이 없었다. 이곳은 각자의 고유한 빛깔을 뽐내는 것이 허용된 한낮의 무도장 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바닥과 벽면에는 열대어들이, 흔들의자에는 바닷새들이 그려져 있었다. 천장에는 다국적 숙박객들의 눈길을 겨냥했을 만국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제 아무리 무심한 방문객이라도 이 공간에 구석구석 스며든 주인장의 개성 그리고 정성만은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색채의 열띤 경연장 안에서도 단연 이목을 사로잡는 존재가 따로 있었다. 그 어떤 휘황한 광채로도 이겨지지 않던 눈부신 아우라. 연예인들의 연예인 같은 존재로서 내뿜던 독보적인 존재감. 주인공은 바로 새였다. 비야 마리의 안마당에 사는 두 마리의 앵무새. 숙박객들은 저마다 한 번씩 새장 앞에 앉아 새들과 지긋이 눈을 맞추다 가곤 했다. 비야 마리에서 유행하는 건 불멍도 물멍도 아닌 ‘새멍’인 셈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타강가라는 지명이나 비야 마리라는 숙소명은 잊을지언정, “앵무새 두 마리가 살던 원색적인 색감의 숙소!” 하면 누구라도 이 공간을 선명히 떠올릴 것만 같았다.
촌구석에 파묻혀 있다고 비야 마리를 저평가해선 안 될 일이었다. 이곳은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읽고 최적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선진형 서비스 제공처였다. 완벽한 청소 서비스가 적시에 제공되는 건 기본이었다. 바다에서 갓 돌아온 다이버들이 사방에 흙 범벅을 해놓은들, 숙소는 잽싼 원상복귀를 보란 듯이 해내기가 예사였다. 예기치 않게 소낙비가 쏟아진대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아침에 걸어둔 빨래가 생각나 헐레벌떡 숙소로 달려가 보면, 천장이 뻥 뚫려 있던 안마당엔 어느새 개폐형 지붕이 쳐져 있는 식이었다.
이처럼 매끈한 숙소 운영이 가능한 건 순전히 이곳 주인장이 기민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그는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에게 기대되는 역할, 그 이상을 수행해내는 사람이었다. 각각의 숙박객에게 알맞은 정보와 필요한 조치를 제공하는 믿음직한 조력자.
데이비드의 백발은 이제 막 그 성성함을 완성한 새것 같아 보였다. 머리칼에 비해 반드러운 그의 피부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집이나 편견이 없어 매사에 합리적인 그의 배포가 그를 한층 젊어 보이게도 했을 것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 잘 생겼다고도 못 생겼다고도 할 수 없는 얼굴. 어쩐지 모든 것이 적당한 그의 외형마저, 모든 언행이 적절한 제 주인을 쏙 빼어 닮아 그런 것 같았다. 그런 데이비드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웬일인지 나는 그 무채색의 얼굴마저 마음에 들었다. 값싼 웃음으로 소비자의 환심을 사려 드는 일이 없는 그의 한결같은 정직성이 느껴져서였다.
데이비드는 이탈리아인이다. 콜롬비아 여인과 결혼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거라고 했다. 슬하에는 열 살 즘 되어 보이는 아들을 두었다. 완벽에 가까운 그의 합리성이 아들에게만큼은 엄격함으로 발현됐던 걸까. 아들이 틀린 시험 문제를 꼬집으며 그가 소리쳤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연하다.
"네가 저지른 건 '에러'가 아니야! 그건 '호러'야! (No es un ERROR! Es un HORROR!)"
그날 이후 이 대사는 비야 마리의 은밀한 유행어가 됐다. 숙박객들은 상대가 실수를 범할 때마다 “네가 저지른 건 호러야!” 하며 놀려댔다. 물론 이 사실을 데이비드는 몰랐다. 몰라야만 했다.
비야 마리의 아침은 특별했다. 시곗바늘이 일곱 시를 채 가리키기도 전부터 숙박객들이 식탁으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전원에 가까운 인원이. 타강가의 여행자들은 아침부터 다이빙 일정이 잡혀있기가 보통이기 때문이었다. 대양으로의 전진을 앞두고 전투적으로 조식을 삼키는 사람들. 그 서슬만 놓고 보면 대테러전을 목전에 둔 해군 특수전전단이라도 돼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식사를 준비했던 데이비드가 숙박객 한 명 한 명에게 살가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스크램블? 프라이?”
그런데 이 일사불란한 아침 풍경을 뒤로하고 내가 비야 마리에서 가장 사랑한 시간대가 따로 있었다. 밤이었다.
오색찬란한 숙소의 내벽 가운데, 어떤 색깔도 덧입지 않은 벽면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바로 그 새하얀 벽면을 스크린 삼아 데이비드는 매일 밤 영화를 틀어줬다. 상영작은 매일 바뀌었다. 다만 그걸 궁금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온 혈기를 바다에 쏟고 돌아온 탓인지, 영화가 상영될 시간쯤엔 모두들 피로에 곯아떨어져 있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었다.
단, 하루만은 달랐다.
흰 벽면 위로 그보다 더 하얀 설산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설산의 풍경 위로 영화 제목이 환하게 떠올랐다. 제목을 읽은 숙박객들은 하던 일들을 하나 둘 멈추고 벽면 앞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인투 더 와일드(INTO THE WILD)’라는 굵은 글씨가 벽면 위에 한동안 선명했다.
명문대를 갓 졸업하고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미국인 청년 크리스토퍼. 사실 그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물질 과잉의 현대 사회에 대해서 깊은 환멸을 느껴온 인물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절대적 자유를 좇기 위한 극한의 여정에 오를 것을 결심한 그. 결국 전 재산을 구호 단체에 기부한 뒤, 지폐 한 장은커녕 신분증조차 없는 혈혈단신으로 야생의 한가운데에 몸을 던졌다. 그 길 위에서 그가 만나게 되었던 사람, 자연, 자아. 그리고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최종의 시련과 최종의 지혜. 이 모든 것이 관객의 가슴에 장엄한 떨림을 전했다. <인투 더 와일드>는 자신의 신념을 따르기 위해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었던 극단의 용기와 의지, 그리고 그의 대담무쌍한 도전을 담은 장대한 로드무비였던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외딴 어촌 마을로 모여든 다국적의 모험가들이 영화 속 주인공의 여정에 깊이 감정 이입했던 걸까.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어느 누구도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다른 차원의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온 듯한 표정이 모두의 면면에 서려 있었다. 생각의 심연에 침잠해있는 몇몇의 눈빛은 어스름 속에서도 또렷이 빛났다.
“영화 재미있었어?”
“네!”
프로젝터를 끄며 데이비드가 묻는 물음에, 우리는 기숙 학교의 학생들이라도 되는 양 우렁찬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두 시간 반이 훌쩍 흘러 있었다. 안마당의 뻥 뚫린 천장을 통해 파도 소리가 넘실거렸다. 2017년 8월 타강가의 여름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다 함께 숨을 죽이고 감상했던 한 남자의 지독한 모험 이야기.
나는 우리가 암묵 속에서 연대한 이 밤의 낭만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고 예감했다. 그리고 내가 게스트 하우스를 연다면 딱 이런 밤을 숙박객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