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1일. 어느덧 아바나 생활 8일 차. 으레 아침 먹고는 살사 수업을, 점심 먹고는 콩가 수업을 들었다. 나의 아바나 여행은 웬만한 패키지 관광보다 분주했다.
오후에는 치히로, 사키를 따라 어느 외진 해변가에 갔다. 엊그제 카페 칸탄테에서 만났던 켄타가 초대한 자리였다. 거기서 음악 공연이 있을 거라더니 정말로 켄타가 흑인 남성 여섯 명과 함께 공연하고 있었다. 관객은 고작해야 일고여덟 명쯤.
공연자들이 연주하던 타악기가 낯설었다. 모래시계 같이 생긴 악기를 가로로 눕혀 무릎 위에 두고 연주하는 폼이 언뜻 우리나라의 장구 같았다. 악기 이름은 바타. 1800년대에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과 함께 쿠바로 건너온 악기라고 했다.
서아프리카인들이 쿠바에 들여온 건 악기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도 그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렇게 서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요루바 신앙’과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 신앙’이 융합해서 탄생한 종교가 산테리아(Santería). 산테리아는 오늘날 쿠바에서 국가 종교라고 불릴 정도로 보편적인 아프로 쿠반 토속 신앙이다.
알고 보니 켄타가 참여한 이 공연도 단순한 음악 공연이 아니었다. 산테리아 종교의식의 일종이었다. 바타는 산테리아 종교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악기라고 했다. 가볍게 공연을 보던 내 마음이 돌연 경건해졌다. 연고 없는 대륙으로 건너와 혹독한 노예 생활을 견뎌내야 했을 200년 전 쿠바 선인들의 토속 신앙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바타를 연주하던 이들 가운데 켄타의 오랜 음악 선생님이 있었다. 미키였다. 저녁에는 다 같이 미키를 따라 그가 소개한 클럽에 갔다.
룸바 클럽이라고 하길래 혹시나 했다. 그런데 역시나 거기서 또 만났다. 나의 사랑스러운 룸베라. 나의 작은 거인.
그녀는 날 발견하자마자 내게 다가와 볼 키스로 인사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우리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세 번을 연이어 만난 걸 그녀도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반복되는 우연이 신기했다. 자꾸 만나게 되니 더 반가웠다. 이 여자는 맨날 이렇게 룸바춤을 추러 놀러만 다니나 생각했는데, 아마 그녀도 날 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
나는 이날도 룸베라의 춤사위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봤다. 그녀의 몸짓에는 속박이 없었다. 구성진 노랫소리와 콩가 소리를 들으며 그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찰나가 생생하게 실감되는 것만 같았다.
#4.
2011년 12월 23일. 아바나 입성 10일 차. 아바나를 떠날 날이 가까워왔다. 이제는 고난도 살사 동작도 어렵잖게 소화했다. 살사만큼은 아니지만 콩가도 그런대로 진도는 나갔다.
요즘 우리 까사에서 제일가는 화두는 뭐니 뭐니 해도 미하루와 토시의 동침 사태다. 호아끼나네 까사에는 4인 도미토리룸이 두 개, 더블룸이 한 개 있다. 그런데 미하루가 까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도미토리룸이 만석이었다. 그녀보다 한 시간 앞서 도착했던 여행자도 같은 이유로 더블룸에 짐을 푼 터. 호아끼나는 미하루더러 그 여행자와 함께 더블베드를 쓰겠냐고 물었다. 참고로 그 여행자는 남자라고. 그 남자는 미하루와 함께 방을 쓰는 것에 오케이 했다고.
미하루도 단번에 오케이 했다. 그녀는 상대 남자가 백 퍼센트 게이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게이가 아니고서야 외간 여자와의 동침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를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는 미하루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미하루로선 안타깝게도, 지켜보는 이들로선 흥미롭게도, 토시는 게이가 아니었다. 너무도 활동적인 이성애자였다. 둘은 하루 종일 티격태격했다. 같이 침대를 쓰는 게 불편해 죽겠다고, 서로 상대방이 방을 나가야 한다고, 틈만 나면 으르렁댔다.
오후에는 치히로, 사키, 미하루, 토시와 에그램에 갔다. 야외 파티오에서 룸바 공연이 펼쳐지는 작은 카페였다. 무대 벽면에 오래된 레코드판 커버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그 위로 빨간빛을 내는 꼬마전구들이 무심하게 툭 걸쳐 있었다.
이제 정말 공연이 시작될 참이었다. 무대에 띄엄띄엄 세워져 있던 스탠딩 마이크 앞으로 흑인 가수들이 한 명 한 명 자릴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 그녀가 있었다. 나의 룸베라. 나의 작은 거인. 그녀와 나는 또 웃으며 인사했다. 일주일에 네 번을 만나다니, 이 정도면 거의 동행이라고 봐야 했다. 그녀가 없는 룸바 공연은 이제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리암. 아바나에서 룸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엔 언제나 미리암이 있었다. 이제 나에게 룸바는 곧 미리암이었다.
미하루와 토시는 저 룸베라가 말로만 듣던 바로 그 “Jin’s cuban best friend”냐며 약속이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가 또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했다. 미하루와 토시는 쿠바를 떠나는 그날까지 끈기 있게 더블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