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ge tu vida!
너의 삶을 선택해!
“안녕 진! 안녕 내 사랑! 잘 지내니? 좋은 오후야! 아니, 좋은 밤이라고 해야 하나! (Hola Jin! Hola cariño! Qué tal? Buenas tardes! O, buenas noches!)”
레베카가 대뜸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인사말만 다섯 문장이었다. 인사말 뒤로도 복수의 문장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마리에한테서 내 얘기 들었다고, 자기도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Puerto de la Cruz)에 산다고, 지금은 살사 댄스랑 바차타 댄스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라고, 밤 열 시에 수업이 끝나면 내게 메시지 보내겠다고, 그때까지 내가 깨있으면 그때 얘기하자고, 안 깨있으면 내일 얘기하자고, 이 섬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주저 말고 자기한테 얘기하라고. 이 정도 분량이면 확실히 문자 메시지보다는 음성 메시지가 편했겠다.
그러니까 이 메시지는 레베카가 내게 보낸 첫 번째 메시지였다. 문자와 음성을 통틀어. 처음부터 곧장 “내 사랑(cariño)”이라고 호칭하는 거나, 문자 메시지 놔두고 구태여 음성 메시지를 보내오는 거나, 지극히 스페인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상대에게도 영어로 치자면 ‘허니’나 ‘달링’ 같은 호칭을 쉽게 쓴다. 예를 들면, 권태로워하는 표정을 한 식당 종업원이 내 눈도 안 쳐다보고는 나를 “내 사랑!” 하고 불러오는 경우가 흔하다는 거다. 그 호칭에 심오한 애정의 의미가 담기지 않았단 걸 이해한 진 오래지만, 아무래도 그런 말은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 적어도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관용적인 표현이라 해도, 그 호칭을 입에 담는 순간 발화자의 마음에도 일말의 존중의 감정은 차오르지 않을까.
첫 번째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 3일 만에 레베카와 나는 첫 만남을 가졌다. 약속 장소는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의 시청 건물 앞. 시청까지 걸어가는 길에 나도 레베카한테 음성 메시지를 보내봤다. 별 내용은 아니었다. 지금 가는 길이라고, 제 시각에 도착할 것 같다고.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닌데 내 목소리를 녹음해놓고 보니 약간 설렜다. 혹여 누가 지나가다 들은 건 아닐까 긴장도 됐다. 객관적인 효용을 논하자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음성 메시지가 편했다. 거북목을 하고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면서 두 손으로 일일이 타이핑할 필요가 없으니까. 당장은 청자가 없는데 핸드폰에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는 게 어쩐지 어색할 것 같았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음성 메시지를 애용하는지 단박에 납득됐다. “곧 만나자 내 사랑! (Nos vemos cariño!)” 음성 메시지 끝엔 나도 이렇게 애정 어린 인사말을 덧붙여 봤다. 스페인 사람들처럼.
시청 앞 광장. 레베카가 나타났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서처럼 빨간 머리를 한 스페인 여인이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저 사람이 레베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레베카는 나보다 강한 확신을 갖고 날 알아본 듯했다. 그녀가 5미터 밖에서부터 날 향해 짓고 있던 함박웃음이 그 증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간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 길거리를 활보하는 동양 여인은 내가 봐도 나뿐이었다.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는 테네리페 섬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다. 테네리페 섬은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 <윤식당 2>를 촬영한 동네인 가라치코가 이 섬에 있다. 카나리아 제도는 스페인령이긴 하지만 북아프리카 대서양에, 사실상 스페인보다는 모로코에 가깝게 위치해 있어서, 스페인에서 한 1년 살았던 나도 <윤식당 2>를 보기 전까진 그 존재를 몰랐었다. 한국인들에겐 생소한 지역이지만 유럽 사람들, 특히 좋은 날씨를 좇아 스페인으로 여행 오거나 은퇴 후 이민 오는 경우가 많은 영국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휴양지라고 한다. 정말로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는 3월 초에도 햇볕이 따사롭고 바닷바람이 선선했다.
레베카와 나는 광장 한편에 있는 카페테리아 테라스석에 마주 앉았다. 우리가 주문한 커피는 바라키토(barraquito). 연유, 우유 거품, 그리고 알코올 약간이 들어간 카나리아 제도 스타일 커피 메뉴라고 레베카가 말해 줬다. 유독 커피만은 달달하게 먹기를 좋아하는 나는 스페인에서 살았던 해에도 카페 봄본(café bombón)을 즐겨 마셨었다. 카페 봄본은 에스프레소와 연유가 일대일로 들어간 커피 메뉴다. 서울에 와서도 한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스패니쉬 카페 라테’라는 이름으로 팔던 메뉴를 매일 같이 마셨다. 이 또한 연유가 들어간 라테다. 다행히 내 혈당 수치는 정상이다. 아직은. ‘이 정돈 마셔도 괜찮아’ 하고 합리화하기 딱 좋다. 그래도 이거 뭐 젊음 빨로 버티고 있는 거지, 이제 나도 슬슬 의식적으로 식단 조절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는데, 그 바른 생각을 이 바라키토 한 잔이 대번에 무찔렀다.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키고 나니 ‘역시 달달한 게 최고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생 뭐 있어’ 하는 생각까지. 이 여행의 끝에서 나는 결국 달콤한 염세주의자가 되어 있으려는 건가.
레베카가 내게 물었다. 마리에한테서 스페인어를 배웠냐고. 마리에는 내가 2018년에 발렌시아에서 사귀었던 친구다. 마리에의 직업이 스페인어 강사니까 레베카가 그렇게 짐작할 만도 했다. 하지만 마리에는 나의 스페인어 선생님이 아니었다. 마리에와 나는 발렌시아 프로 축구 클럽인 발렌시아 CF를 함께 ‘덕질’하다 알게 된 사이였다. 웬 동양 여자애가 발렌시아 CF 응원가를 열성적으로 부르던 모습을 보고 놀란 마리에가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게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내가 테네리페 섬에 간다고 마리에에게 말했더니 마리에가 그 섬에 사는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바로 레베카였다. 마리에와 레베카가 서로 알게 된 계기가 그나마 평범했다. 레베카 역시 스페인어 강사로, 최근 몇 년 간은 여름마다 발렌시아에 가서 스페인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어쩐지 레베카와 내가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의 광장 한편에 마주 앉아 있을 이유도, 레베카가 나를 “내 사랑, 내 사랑” 하고 부르며 기특해할 이유도, 내 몫은 내가 지불하겠다고 암만 말해도 레베카가 그걸 끝내 고사할 이유도 없어 보였지만, 레베카는 아랑곳없이 나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자기 사는 이야기를 내게 미주알고주알 들려주었다. 마치 내가 자기를 찾아 멀리서 온 손님이기라도 한 것처럼.
요즘 레베카가 빠져 있는 건 크게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댄스 수업, 또 하나는 이탈리아어 공부. 퇴근 후에 살사와 바차타를 배우는 게 일상에 활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리란 것쯤은 부연 설명을 듣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탈리아 공부라니 의외였다. 어렸을 적에 스페인 친구와 이탈리아 친구가 각자의 언어로 말하면서도 서로 대화가 통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나도 미디어에서 이탈리아어가 나오면 완벽히는 못 알아듣더라도 그 맥락을 대략 유추해 볼 수는 있다(너무 대략이긴 한데 아무튼). 시간을 들여 익히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외국어를 레베카가 구태여 공부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탈리아에서 살아 보고 싶어서야. 이탈리아는 낭만적인 나라잖아?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칠 거야! (Porque quiero vivir en Italia. Italia es un país romántico, ¿verdad? ¡Voy a aprender italiano y enseñar español en Italia!)”
이 얘기를 하던 와중에도, 레베카는 지나가던 옆집 가게 사장님과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내가 보기엔 별 일도 아닌 일로 웃음이 터졌던 데다, 그 둘은 오늘 처음 본 사이였다. 처음 본 사람과 별안간 웃고 떠드는 게 한국에선 흔치 않은 일이라고 내가 말했다. 레베카는 “그래?” 하고 놀라면서, 스페인 사람들은 몹시 “amigable”하다고 대답했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런 면에서 비슷한데, 그 중간에 낀 프랑스 사람들만 왜 그렇게 차갑게 구는지 모르겠단다. (이 글을 프랑스 사람이 읽는 일은 없기를.)
Amigable. 익숙지 않은 단어였다. 뜻을 미루어 볼 수는 있었다. ‘친구(amigo)’라는 단어에 ‘–able’이라는 접미사가 붙었으니 영어로 치자면 ‘friendly’ 같은 말이 아닐까? 나중에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니 ‘친숙한, 정다운’ 등으로 풀이되어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情)’의 민족이 아니던가 싶으면서도, 그 정을 보다 뜨겁게 표출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태도가 내 정서랄까 성향이랄까 하는 것들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지금껏 스페인을 좋아해 온 것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레베카에게 감정이입하기가 쉬웠던 건 그 때문이었을 거다. 본인도 ‘amigable’한 사람들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 ‘amigable’하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이웃나라를 동경하고 그곳에 가서 살 꿈을 꾸고 있던 레베카.
그 순간 불현듯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
이탈리아가 좋아서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이탈리아에 가서 스페인어를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는 레베카처럼, 나도 스페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돌연 떠오른 것이었다. 천둥을 동반한 한 줄기 번개처럼 머릿속에서 쾅하고 빛을 내며.
스페인에서 살았던 해에 이따금 바르셀로나를 찾아가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게일이라는 프랑스 친구. 미국 대학에서 함께 교환 학생으로 지냈던 친구였다. 게일이 바르셀로나에 살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바르셀로나가 좋아서. 게일의 직업은 프랑스어 강사였다.
게일은 중국의 벽지에서도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몇 년을 살았었다. 바르셀로나에 오기 직전에는 세이셸 공화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었고. 중국에 오래 살았던 덕분에 아시아 특유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십분 이해하는 게일과의 대화가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게일이 부러웠다. 모국어가 세계적으로 수요가 높으니까 전 세계 어딜 가도 일할 수 있구나 하고. 물론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것쯤은 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한국어 교수법을 다년간의 노력으로 익힌다 한들, 한국어에 대한 수요는 프랑스어처럼 전지구적으로 높진 않을 테니 그 능력을 활용해 고를 수 있는 지역 선택지는 제한적이지 않을까.
그런 연유로 기억의 심연에 묻어두어 왔던 판타지 같은 아이디어였다. 내가 살고 싶은 나라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살아본다는 환상. 그런데 레베카를 만나고서 그 아이디어를 다시 수면 위로 건져 올려 보게 된 건 최근의 정세 변화 때문이기도 했다. 5년 만에 돌아온 스페인에서는 “한쿡어 초큼 배워써효”라며 수줍게 말을 걸어오는 현지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현상이 아직 젊은 세대에 국한된 추세로는 보였지만, 동아시아 팝문화를 마니아적으로 탐닉하는 극소수 집단에게서만 한국 문화 또는 한국어가 사랑받던 시대는 이제 확실히 과거가 되었다는 인상이었다.
스페인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어두운 팬데믹의 시대를 지나 4년 만에 처음 나간 해외 여행지에서도 한국을 보는 외국인들의 시선이 변화했다는 것을 여러 번 체감했었다. “웨얼 아 유 프롬?”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이 엠 프롬 코리아”라고 대답하면 되돌아오는 리액션의 양상이 달라졌던 것이었다.
“쿨!”
언제부터 한국에서 왔다는 게 ‘쿨’한 게 되었을까. 유럽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쿨!”하다고 내 국적을 인지해주는 상황을 팬데믹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커녕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것처럼 생긴 미국 여행자들도 나한테 말하곤 했다. “오우, 케이팝 이즈 쏘 쿨.” 케이팝을 쿨하다고 여기는 게 진심인지 아닌지야 내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오타쿠’가 아닌 서양 시민들도 케이팝의 실체를 제법 인지하고 있는 시대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였다.
레베카와 헤어진 뒤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에서 남아도는 혼자만의 자유 시간. 나는 홀로 공상을 이어갔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도 중단하지 못할 내 머릿속 상상. 초현실적이어 보이지만 현실이 되지 못하리란 법도 없어 보이는 구상. 마리에를 만나면 마리에가 일하는 어학원이나 다른 어학원들에서 한국어 수업에 대한 수요가 있는지 물어봐야지. 바르셀로나에 가서 게일을 만나면 게일한테도 물어봐야지. 수요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수요가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내가 참여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지. 한국에 돌아갔을 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알아봐야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 해도 그 준비 기간마저 즐거울 것 같아. 하기 싫은 공부는 죽기보다 하기 싫었지만, 스페인어 공부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어도 오래 재미있게 했으니까. 가장 재미있게 배워뒀던 스페인어로, 가장 좋아하는 스페인에서, 가장 신나고 유익하게 살아볼 방법을 궁리해 봐야지.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갈수록 공상에 날개가 돋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2018년 겨울 발렌시아에서 나와 마리에가 친구가 되었던 것. 누구도 자연스럽다 말할 수 없을 그때 우리의 만남 역시 사실은 내 안의 판타지를 수면 위로 이끌어내기 위한 신의 인도가 아니었을까! 공상은 재미있다.
나는 달콤한 염세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인생 뭐 있어’ 모드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인생 뭐 별 거 있나. 어차피 죽고 말 인생. 일에 갇혀 죽느니, 재미있게, 나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살다 죽자!’ 염세주의는 염세주의인데 이거 원 너무 달콤해서 어지럽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건 안다. 이 세상이 나의 욜로 정신을 막무가내로 다 받아주지 않으리란 것쯤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그래도 일단은 내가 바라는 것에 집중하자고 다짐한다.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아이고, 이번 생에서 그걸 못해 본 게 못내 후회되네’ 하고 속이 쓰라릴 만한 것이 무엇일지를 잊지 않기로 한다.
다음날 아침.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에 머물면서 내가 매일 같이 아침 식사 하러 간 카페테리아에 어김없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테라스의 옆 테이블에는 할아버지 두 분이 앉아 계셨다. 어제도 뵌 분들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저께도, 그끄저께도 뵈었다. 나처럼 아침마다 이 카페테리아에 출근 도장을 찍는 분들이신 것 같았다. 푸에르토에서 보기 힘든 동양 여자를 매일 아침 여기서 보는 게 신기하셨는지, 마침내 할아버지들께서 내게 말을 거셨다. 이 섬에서 뭐 하는 중이냐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직업은 뭐냐고, 결혼은 했냐고. 의사라고 말씀드렸더니 여기로 이민 와서 의사 일을 하라신다. 산타크루즈 데 테네리페(테네리페 섬의 수도)에 의사 부족하다고, 여기 와서 일하면 딱이라신다. 여기 남자를 만나서 결혼까지 하면 금상첨화라신다.
“Elige tu vida! (너의 삶을 선택해!)”
목청이 더 높은 쪽인 할아버지께서 크게 외치셨다. 그 한마디가 그날 하루 뇌리를 계속 맴돌았다. 엘리헤 뚜 비다. 너의 삶을 선택해. 설마 이것까지도 신의 인도이고 계시인가!
그날은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날 해가 밝으면 테네리페 섬의 남쪽 동네 코스타 아데헤(Costa Adeje)로 내려갈 예정. 섬의 남쪽은 뜨거운 태양 아래 해수욕을 즐기러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일 거라고 주의를 여러 번 받았다. 괜히 고생해서 내려갔다가 ‘여기 오지 말고 그냥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에 남아있을걸’ 하는 후회가 들면 어떡하지. 햇살도 너무 뜨겁지 않고, 바람도 선선하고, 관광객의 밀도도 적당하고, 동네 분위기도 온화한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를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걱정과 아쉬움은 뒤로 하고, 나는 내일 간다. 코스타 아데헤로. 기왕지사 이 먼 아프리카 섬까지 왔으니까 북쪽도 찍고 남쪽도 찍고, 남들 찍는 거 다 찍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 때문은 조금도 아니었다. 코스타 데 아데헤에 가보면 막상 너무 좋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부딪혀 봐야 안다. 직접 겪어 봐야 안다. 예상만으로는 모르는 일이다.
괜스레 감상적이어져서 평소라면 호스텔 침대에 들어가서 벌써 곯아떨어졌을 시각(밤 아홉 시)까지 푸에르토 데 라 크루즈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어느 옷가게에 들어갔는데 액세서리 코너에서 손거울을 팔고 있었다. 손거울 뒷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Better an oops than a what if. (‘그때 그랬었더라면’보다는 ‘웁스!’가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