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광섭 Nov 21. 2019

이제 헌혈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새로운 헌혈 앱 [레드커넥트] 제작 후기


2019년 11월 오픈한 공식 헌혈 앱 [레드커넥트]의 제작 후기입니다. ICT(정보통신기술)를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이나 서비스 제작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재미있는 사례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지난 11 1, 새로운 공식 헌혈  ‘레드커넥트 오픈했습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의 책임 매니저였구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수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얻어 새로운 헌혈 앱을 완성하기까지 일 년 반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문제를 찬찬히 진단하고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데 꼬박 1년, 그리고 앱을 뚝딱뚝딱 만드는데만 6개월의 시간이 들었는데요.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헌혈 앱을 써볼  있습니다.


앱을 출시하고 그동안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매일 2,000-3,000분 정도의 새로운 사용자가 서비스를 다운로드하고 있습니다. 초기 오류를 대부분 해결한 시점에서 이번 서비스의 기획 의도와 진행 과정을 글로 꼼꼼히 정리해 놓고 싶었습니다. 이 사례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도전자들에게 재미있는 발자국이자, 동시에 생생한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해결하려는 문제

[왜 아직도 피가 없어서 고통받는 환자가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한해에 약 297만 명의 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피를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41만 명의 환자가 그 혈액 덕분에 삶을 이어나가고 있지요. 언뜻 보면 굉장히 충분한 사람이 헌혈을 하는 것 같지만 생사가 오고 가는 병원 현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헌혈이 줄어드는 방학이나 혹한기가 되면 환자에게 필요한 수혈용 혈액이 바닥나곤 합니다. 작년 한 해, 전국 각지의 의료 현장에서는 약 1만 2천 명의 환자가 제때 혈액을 공급받지 못해서 끙끙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41만 명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피가 부족하다혹은 ‘헌혈해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랍니다. 또 지인들로부터 헌혈증서나 지정헌혈을 요청하는 연락도 종종 받습니다. 수술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응급 상황에서 혈액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간이식 수술의 경우 환자 한 명이 40L의 혈액을 쓰기도 합니다.) 이 현상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았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시스템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 곁에서 있어야 할 가족이 사방팔방 아쉽고 어려운 부탁을 하며 애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때마침 회사에서 ICT(정보통신기술)를 활용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안해보라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구성원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면 서비스 개발비와 시간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야말로 오랫동안 이어진 혈액부족 문제를 제 손으로 그리고 우리 이름으로 해결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얻었습니다.



원인 탐색

[혈액 부족 문제는 왜 생기는 걸까?]


제가 맨 처음 가졌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이 헌혈하도록 만들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단순하게,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이 헌혈의 집에 가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괴상한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헌혈의 집에 최신형 게임기나 인공지능 스피커를 넣어보기도 했고, 헌혈하고 받는 기념품을 조금씩 더 비싼 것들로 바꿔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얼핏 들어도 미봉책에 그치는 이런 계획이 제대로 먹혀들리가 없었습니다.  


효과는 굉장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망한 뒤(?) 다시 찬찬히 통계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헌혈한 사람의 89.7%는 첫 번째 헌혈 이후 5년간 다시는 헌혈을 하지 않는다’는 통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10명의 사람이 첫 번째 헌혈을 하면 대략 9명 정도는 평생 다시는 헌혈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문제의식을 아주 조금 틀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헌혈을 하게 할까’에서 ‘어떻게 하면 한번 헌혈을 했던 사람이 또 오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인터뷰 대상을 ‘헌혈을 안 하는 사람’에서 ‘헌혈을 한두 번만 하고 그만둔 사람’으로 바꿨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떤 생각에서 헌혈을 그만둔 것인지 궁금했거든요. 처음 '헌혈 중단자' 분들을 인터뷰하면 백 명중 팔십 명이 ‘시간이 없어서’ 혹은 ‘귀찮아서’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대개 이런 이유는 진짜 이유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이분들이 ‘시간이 없어지고, 귀찮아진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1시간씩 캐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다 보니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를 얻었습니다.



문제의 원인

[사람들은 어째서 헌혈을 그만두는 걸까?]


헌혈 중단자 분들이 말한 첫 번째 이유는 ‘자기가 한 헌혈이 잘 전달된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헌혈자들은 ‘나는 내 몸이 피곤할 것을 감수하고 한 시간이나 들여 피를 나눠줬는데 이것이 제대로 쓰인 것인지, 누군가 정말 나 때문에 생명을 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헌혈 이후 자기 혈액의 전달이 깜깜무소식이니 누군가 옆에서 ‘야 이 바보야! 너가 헌혈한 피 그냥 가져다 팔고 있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반박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이처럼 '헌혈을 하지 않는 사람'이 '헌혈을 하는 사람'을 교육했습니다.


내 피인데.. 내가 모르는 게 이상해요


둘째는 헌혈이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헌혈자들은 헌혈이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겠지만, 정작 나 자신은 피곤하기만 할 뿐이니 이 행동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지금 헌혈을 하면 헌혈의 집에서 영화 관람권이나 편의점 교환권을 줍니다. 이런 물질적인 보상은 10대, 20대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영화권 정도는 자기 돈으로 손쉽게 사는 30-40대의 입장에서는 헌혈이 보상하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헌혈하는 사람들, 특히 중장년에게 의미 있는 새로운 보상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헌혈이 생각보다 번거롭다는 것이었습니다. 큰맘 먹고 헌혈을 하러 가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처럼의 착한 일에 30분씩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헌혈을 예약하는 앱이 있었지만 시스템이 너무 번거로웠습니다. 2011년에 만들어진 기존 헌혈 앱은 갤럭시 1에서나 볼법한 UI를 자랑했습니다. 더불어 지난 10년간 추가된 온갖 기능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헌혈을 처음 하는 사람은 어디에 무슨 항목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수강신청 페이지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UI

프로젝트의 과제는 세 가지로 단순해졌습니다. 새로운 헌혈 서비스는 헌혈자에게 '당신의 혈액이 잘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헌혈을 꾸준히 했을 때 지금과는 다른 보상’을 주며, ‘헌혈까지의 절차를 더욱 간편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해결책

[투명하고, 건강하고, 간편한 헌혈]


첫째, 새로운 헌혈 앱은 혈액의 전달을 투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헌혈 이후에 ‘나의 혈액’이 이동하는 과정을 헌혈자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도록 바꿨습니다. 이제 기증자는 헌혈이 끝난 뒤 본인의 혈액이 헌혈의 집 -> 혈액원 -> 혈액 검사 센터 -> [출고]로 전달되는 경로를 푸시 알림으로 받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앱은 현실적인 한계로 혈액 검사 센터까지의 추적만 지원합니다. 하지만 올해 12월 안으로 그 이후의 과정(예: 혈액 출고)을 계속 추가해 나갈 예정입니다.

헌혈의 집 -> 혈액원 -> 검사센터 -> 출고


이 시스템을 만들 때는 이미 같은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스웨덴과 미국의 적십자사 담당자를 찾아 자문을 구했습니다. '나는 한국 IT기업의 사회 공헌 담당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당신 나라에 있는 것처럼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싶다. 몇 가지 물어보아도 괜찮겠느냐. 비슷한 경험을 공유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두 담당자 모두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 어처구니없는 메일에 친절하게 답해주었습니다. 특히 스웨덴 적십자사의 팀장님은 앞으로 궁금한 건 자신에게 물어보라며 좋은 자문역이 되어주었습니다.


너무 친절해서 놀라웠던 캐롤리나


둘째로 건강한 헌혈을 만들었습니다. 혈액을 기증하면 헌혈자의 혈액검사 결과를 누적/분석해서 자기 몸상태를 촘촘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전에는 혈액검사 정보가 질병이 있을 때 우편으로 발송되거나 엑셀 형태로만 저장되곤 했습니다. 이제는 혈액검사 정보를 건강관리 위주로 개편된 UI에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헌혈을 반복하는 착한 사람에게는 시중의 일반적인 헬스 앱이 제공하는 '만보기나 칼로리 측정기'보다 훨씬 좋은 건강관리를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총 15종의 혈액검사 결과를 누적하고 분석합니다


이때 고민했던 것은 헌혈자가 받아볼 수 있는 정보의 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국민건강보험공단을 찾아갔습니다. 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국민 건강검진 통계를 받아 이것을 가공했습니다. 헌혈하는 사람마다 그 사람에게 맞는 건강 리포트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0대 남성과 50대 여성이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건강 정보는 다릅니다. 또한 두 집단의 평균적인 수치나 질병 발생 확률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정보들을 알기 쉽게 편집하여 개개인 별로 정리하였습니다.


건강 정보의 UI를 만들며 제가 가장 지양한 것은 ‘복잡함’이었습니다. 수치 정보를 다루는 UI는 조금만 대충 만들어도 병원의 의료 차트처럼 끔찍한 화면이 되고 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볍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UI’를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앱스토어에 올라와 있는 모든 건강관리 앱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한 UI의 힌트를 얻고 이를 적용했습니다. 새로운 헌혈 앱은 혈액 검사 결과에 대해 시중의 어떠한 건강관리 앱보다도 단순한 UI를 자랑합니다.


어려운 혈액 검사도 쉽고 단순하게


마지막으로 간편한 헌혈을 만들었습니다. 기존 헌혈 예약은 여러 페이지를 거쳐 복잡하게 진행해야 했습니다. UI도 2000년대 초반 대학교 수강신청 페이지를 연상시켰습니다. 헌혈자들은 빽빽하게 차있는 시간 슬롯에서 본인이 들어갈 위치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번거로움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헌혈 앱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가장 선진적이라고 하는 미국과 뉴질랜드의 헌혈 앱도 예약을 완료하기까지 정보를 입력하는 페이지가 6장 이상이었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도 10초 이내에 끝낼 수 있도록


제가 헌혈 예약 화면을 만들 때 세웠던 원칙은 ‘1. 한 화면 안에서, 2. 버튼 클릭 5번 이내로 예약을 끝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줄 글은 최대한 줄이고 디자인과 인터랙션만으로 다음 버튼을 유도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좋은 디자인이 나왔다고 생각할 때면 40-50대와 같이 비교적 앱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모시고 사용성 테스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버튼을 누르는지,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지를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현재 앱의 디자인은 그렇게 엎고 엎은 결과물의 N번째 버전입니다.



앞으로

[바보 같은 사람에게 더 좋은 세상을]


저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헌혈과 관련된 사람을 300분 이상 만났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600번 이상 피를 기증하시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헌혈을 못할까 봐 걱정이라는 목사님도 계셨고, 사업에 실패한 후 자살하기 직전, 세상에 마지막 쓸모가 되고자 피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중견기업 이사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헌혈을 했지만 이 봉사가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가치 행동’이라는 점은 동일했습니다.


헌혈자, 간호사, 전문의, 병리사 등등..


물론 이번에 새로 만든 헌혈 앱이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정말 많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더 좋은 서비스를 도입하기 위해 국회를 비롯해 모든 기관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실패했습니다. 법 개정이나 정책 변경은 일개 기획자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다 보니 한동안은 번아웃 오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작은 변화를 시작한 데서 만족합니다. 앞으로 더 뜻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서비스를 한 발자국 훌륭하게 개선하고, 결과적으로는 혈액 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지금의 [레드커넥트]는 지구 상에서 가장 좋은 헌혈 앱이라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혈액관리 플랫폼도 기증한 혈액의 검사 결과로 건강 리포트로 제공하거나, 한 페이지에서 5번의 클릭만으로 헌혈 예약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기증된 혈액의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기능도 미국과 덴마크 이외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기능입니다. 우리나라 시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헌혈 앱을 쓰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잠결에 부스스 일어나는 순간조차 뿌듯한 일입니다.


스페인 MWC 발표: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혈액 부족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팀원들과 공유했던 궁극적인 목표는 ‘선한 사람이 더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조금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남을 위해서 자기 몸의 일부와 시간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비합리적이고 바보 같은 사람’이 더 건강하고 살맛 나는 세상을 짓고 싶었습니다. 저는 목표했던 것을 전부 해내는데 실패했고, 지금의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이내에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새로운 기획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새로운 헌혈 앱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 많은 '바보'들이 새로운 앱으로 인해 보다 뿌듯하고, 건강하고, 편리한 헌혈을 실천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 사회공헌 서비스의 제작 후기입니다.

** 과거(10년 이내)에 헌혈 기록이 있는 분은 앱을 다운로드하고 본인의 혈액 정보를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도 할 수 있는 앱 설계서 작성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