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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Aug 16. 2018

[백인보⑤]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내일을 가져다 준다.

프랑스인 정성수 씨

우리는 40년 뒤의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프랑스 작은 마을 랑그르에 사는 마티어스 푸코(40)에게는 서른 두 해를 간직해온 쪽지가 있었다. 그 쪽지는 그가 아홉 살 때 비행기 안에서 직접 쓴 것이지만, 이제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뒤, 모국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쪽지는 마침내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에 의해 해석되었다. "정성수 9살이에요. 광덕국민학교 2학년 12반 15번.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시 한국에 오겠습니다.” 신문기사는 그가 ‘말 못 할 감정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이 짧은 쪽지에서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성수라는 이름은 마티어스 푸코로 바뀌었다. 아홉 살은 사십 살이 되었다. 광덕 국민학교는 광덕 초등학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프랑스인이다. 그는 한국에 가지 않았다. 푸코 씨의 오늘은, 마치 그의 모국어처럼, 아홉 살의 정성수가 그린 미래로부터 하루하루 희미해져 온 결과였다.     



과거는 사라진다.


페이스북에 남긴 글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나를 다시 찾아온다. 그때 마다 과거의 나는 타인보다 멀고 낯설다. 일 년 전의 내가 꾼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나지 않는데, 페이스북은 그때 내가 꾼 꿈 속의 대사까지 기억하고 있다. 때때로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한 말과 행동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완전한 타인 같다.     


과거는 애써 건져내지 않으면 떠내려간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친구와 어떤 메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급식을 무수히 먹으며 기억나지 않는 잡담을 하루 종일 해온 덕에 오늘 그 애에게 전화를 걸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 기억나지 않는 식사들 덕에 나의 몸은 건강할 수 있었다. 한때 내 몸을 이루었던 것들은 지금쯤 내 몸이 아닌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과거가 된다. 콩나물에 주는 물처럼 우리를 키우되, 온간 데 없다.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내일을 가져다 준다.


중학생 때 이후로 다이어리를 거의 항상 썼다. 보통 일 년에 한 번쯤 그 다이어리들을 다시 읽는다. 그 연례행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한쪽 구석에 적힌 아주 작은 소망들도 대부분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시를 읽고 싶다, 라는 작은 한 마디가 스물 무렵의 삶을 결정했다. 작은 소망들은 의식으로부터 도망쳐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 내 행동의 키를 잡아 채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만난 문장이, 사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 지닌 소망은 기필코 내일을 가져다 주고야 마는 것이다. 소망을 바르게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다시, 정성수의 쪽지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부분이다. 그는 아홉 살 때 기대했던 것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물음이 서늘한 것은 그것이 아홉 살의 내가 현재의 내게 묻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애는 20년이 흐른 뒤의 나에게 실망할까, 만족할까, 혹은 응원할까, 아니면 위로할까. 오늘의 나에게도, 오늘로부터 20년이 흐른 뒤의 나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다만, 아홉 살의 나와는 달리, 스물아홉의 나는 이런 것을 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실패할 것이라는 것. 그러나, 그 실패를 극복해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며 그 방식으로 인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 나는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극복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바른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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