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 눈을 뜨는 순간 시작된 타락

by 나름 nareum


*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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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얼굴"이 그리는 궤적은 기괴할 정도로 서늘하다.

이 영화는 단순히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거나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평범한 서사를 거부한다.

대신,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환경에 종속적인지, 그리고 '시각'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지를 노골적으로 파헤친다.

누구나 가질만한 영화의의 마지막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결말을 기대하겠으나, 살인과 처벌의 부재로 끝나는 결말이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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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상호의 시선: '돼지의 왕'에서 '얼굴'까지


연상호 감독은 데뷔작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통해 계급 사회의 폭력성과 종교적 맹신 뒤에 숨은 인간의 비겁함을 집요하게 파헤쳐 왔다.

실사 영화인 <부산행>이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도 재난이나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보다,

그 혼란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성'에 주목했다.

신작 "얼굴"은 이러한 연상호식 세계관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이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집단적 광기를 다뤘다면, <얼굴>은 한 개인의 '감각'과 '욕망'이라는 보다 본질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건드린다.

<지옥>에서 고지라는 초자연적 현상이 인간을 시험했다면,

<얼굴>에서는 '시력의 회복'이라는 축복 같은 기적을 통해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쉽게 부패하는지를 시험대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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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암흑 속의 낙원: 보이지 않기에 가능했던 위장된 순수

영화의 주인공은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다.

그는 세상의 색채도, 타인의 이목도 알지 못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그가 가진 신체적 결함이 오히려 그를 세상의 독소로부터 차단해주는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타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본질을 목소리와 체온,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배려로만 판단한다.

이 시기에 그는 한 여성과 결혼하여 소박하지만 밀도 높은 행복을 누린다.

장님이라는 '제한적 상황'은 그에게 세상의 강제적인 제약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그를 외모지상주의라는 거대한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때의 주인공은 누구보다 도덕적이며, 편견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연상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 '순수'가 주인공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단지 '악해질 도구가 결핍되었기 때문'임을 암시하며 서서히 공포의 씨앗을 뿌린다.



3.아들의 눈을 통해 투사된 추악한 본성

영화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끝내 눈을 뜨지 못함으로써 더욱 깊은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는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장애를 가졌기에 더더욱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의 기준에 매몰되어 있었다.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음에도 그가 보여주는 속물적인 태도는, 인간의 추악함이 감각의 유무가 아니라 영혼의 밑바닥에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사이비>에서 진실을 알고도 거짓을 선택하는 인간들의 모습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혹은 보이지 않아도 이미 타락해 있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



4. 살해와 공소시효: 정의라는 환상을 걷어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내를 살인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여기서 관객은 일말의 정의를 기대한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소위 말하는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적인 결말 말이다.

그러나 연상호는 냉혹하게도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주인공은 살인을 저지르지만, 세월은 흘러 공소시효는 지나버린다.

그가 눈을 뜨고 얻은 '시각적 권력'은 그를 사회적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는 번듯한 '얼굴'을 한 채 대중 앞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된다.


왜 영화는 권선징악을 택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연상호 감독이 생각하는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만큼 성숙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얼굴' 뒤에 숨은 살인자의 미소를 눈감아주는 곳이라는 냉소적 선언이다.

공소시효라는 장치는 법적인 처벌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 저지른 근본적인 죄악이 시간이라는 벽 뒤로 얼마나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는지를 상징한다.



5. 우리가 마주한 진정한 '얼굴'은 무엇인가

결국 영화 <얼굴>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경고' 따위의 가벼운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근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을 때만 인간적일 수 있었다.

시력을 얻고 세상의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의 영혼을 팔고 괴물이 되기를 선택했다.

영화는 처벌받지 않은 채 번듯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마지막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며 관객에게 묻는다.

저 얼굴 뒤에 숨은 추악함을 보지 못하는 우리 역시, 결국 시각이라는 감각에 눈이 먼 또 다른 장님들이 아니냐고.

이 영화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얄팍한 '얼굴'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폭로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연상호는 다시 한번 증명했다.


가장 무서운 지옥은 저세상이 아니라, 눈을 뜨고 마주하는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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