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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Aug 31. 2023

죽고 사는 문제

고작 시속 10km 차이가 운전자를 행복하게 해줄까?

특정 사안에 우리는 이중적 태도를 보입니다. 

부동산이 너무 올랐다고 거품 물지만 내 집값 떨어지는 건 절대 바라지 않습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면 법이 물러터졌다고 분통 터뜨리면서 난폭 운전, 과속으로 인한 사고를 줄이려는 규제에는 알러지 반응을 보이죠. 

사람은 이기적이에요. 이해득실에 따라 입장을 바꾸죠. 비난기 어려워요. 모두가 그러니까.


그렇다 해도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대한민국이지만 OECD 평균 대비 부끄러운 기록도 여럿입니다. 

교통안전 수준도 그러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한해 교통사고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해는 1991년이었어요. 

무려 13,429명이 차에 치어 죽었죠. 다행히 2013년 이후부터는 꾸준히 줄고 있어요.

작년 2022년에는  2,735명까지 줄었습니다. 전년대비 6.2% 감소된 수치. 1970년 이후 가장 적죠.

바람직한 추세입니다. 


통계를 발표한 도로교통공단은 보도자료에서 

“관계부처, 경찰청 및 유관기관의 적극적인 교통안전 대책과 성숙된 교통안전 의식이 합쳐진 성과”

라고 밝혔어요. 

여기서 방점을 찍을 단어는 ‘대책’과 ‘의식’입니다. 

잘 세운 대책과 잘 지키려는 의식. 두 가지가 교통선진국을 만들죠.


2021년, 경찰청은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줄이기 위해 ‘안전속도 5030 정책’을 시행했어요. 자동차 전용도로를 제외한 시내 차량 최고 속도를 기존 60km/h에서 50km/h로, 학교 주변 등 이면도로에서는 30km/h로 제한하는 정책이죠.


효과는 즉시 나왔어요. 2021년 속도 제한 도로에서 사망자 수가 27.2% 줄었습니다. 인천시의 경우 정책 시행 3개월 만에 교통사고 건수가 9.6% 줄고, 사상자도 14.4% 감소했어요.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융통성이 없다,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탁상행정이다, 현실적이지 않다 등등. 언론도 비판에 가세했고요. 어느 교수는 칼럼에서 속도를 제한하면 오히려 운전자에게 스트레스를 줘 역효과를 낸다고 주장했어요. 열 받아서 사고를 촉발한다는 논리예요.


새로운 정부는 불만에 적극 화답했습니다. 시행 2년 만에 정책을 폐기했어요. 

취지는 좋지만 탄력 적용이 필요하다고 하면서요. 여당 대표는 

“이 정책이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든다”

고 주장했죠. 예외를 두고 합리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서울시도 제한속도를 60km/h로 올리며 표지판을 다시 바꿨습니다. 

운전자들은 환호했어요. 시속 10km 때문에 속이 시원해졌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서울시내 차량 평균 주행속도를 고려하면 논리가 무색합니다. 

조사에 따르면, 서울 도심 차량 평균 시속은 20km가 되지 않습니다. 

외곽 도로 역시 25km/h를 넘지 않아요. 

이런 현실에서 시속 10km를 올리면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는 건가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시속을 10km 줄였을 때 목적지 평균 도착 시간은 겨우 2분 차이라는 조사도 있어요.


프랑스 파리는 2021년부터 시내 전역의 차량 속도를 30km/h로 제한했습니다. 

우버 종사자를 비롯해 운전자 불만이 많았죠. 하지만 그대로 시행됐습니다.

이미 파리 시내 평균 주행속도가 20km/h 정도여서 비현실적 규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운전자 불편 때문에 파리가 주행속도를 다시 올렸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없어요.


파리보다 먼저 시속 30km 속도제한을 시행한 도시는 많아요. 

브뤼셀, 빌바오, 밀라노와 볼로냐 등 유럽 주요 도시들이 도심 내 차량 속도를 강력히 제한합니다. 

미국 뉴욕은 2014년부터 모든 로컬 도로에서 40km/h 제한을 유지하고 있죠. 

“모든 뉴욕 주민들이 운전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걸을 때 도로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권리가 있다”

는 이유에서입니다.


정책 입안과 시행에는 명료한 근거와 사례가 뒷받침됩니다. 

속도를 강제로 줄였을 때 더 안전해졌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하죠. 

그런데 정책을 뒤집는 데는 근거와 논리가 빈곤합니다. 통계나 사례가 아닌 감성적 수사가 동원되죠. 

탄력적 운영, 융통성 발휘, 국민 정서, 운전자 스트레스 같은 모호한 화법 말이에요.


안전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불편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인명이 걸린 법과 규칙에 예외와 융통성이 끼어들 여지는 없지요. 


문화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을 줄일 유일한 방법은 단호함과 일관성 유지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죠. 알지만 감수하기 싫을 뿐. 


수시로 바뀌고 예외와 융통성이 적용되는 법과 규칙을 누가 무서워할까요.



사진 Andrew Teoh,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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