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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창작 문학 】

[문학적 표현의 깊이]

현대 문학이라는 개념과 아웃사이더(outsider) 문학을 깊이 있는 연구는 하지 못했지만 현실 문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현실을 그리려 한다.
 현실 문학은 의식이 투철하고 고매 한데서 출발한 것 같이 보이지만 현실 문학에 대해 구조와 논리를 언어의 성숙으로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단면을 조금만 해석을 한다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 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얼마나 인간의 가치가 문학의 가치와 비례하는 등식을 따진다면 인격의 수용성 사상의 고매성이 얼마나 있느냐의 언어의 맛깔나는 표현의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가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균형감각과 격식을 높이는 성품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문학에 있어 일제 강점기 시절 한용운이나 최남선 등은 원칙적 출발로 시인이 된 것은 아닌 것이다.  

정작 문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즉 시대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고 보는 것이 정석이라 보면서 필연적 의식으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나 애국심과 나라를 잃은 슬픔과 좌절에 독립에 대한 의지가 너무도 강한 중심적 즉 가치를 중요시하는 문학성을 세우기보다는 시류(時流)에서 탄생 된 우연이었을 것 같다.           

이는 프로의 속성이 아닌 일반적 속성이 지배하는 요인으로 작동될 확률이 높기에 단단하고 투철한 정신이 문학 작품 속에 투영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용운 선생은 3.1 독립운동에 대한 요인이 없었다면 <님의 침묵>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 본다.

1940년{문장}에 전국 문학가 주소록엔 소설가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남선 선생의 신체시<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청소년을 깨우치기 위한 수단일 뿐, 문학적인 열망과는 다른 자리에서 출발했고 시조집 <백팔번뇌> 또한 문학 의식이 확고한 결심에서 쓴 작품이 아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종의 아웃사이더(outsider)로 출발한 것은 아닐까?
 문학의 아웃사이더(outsider)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맥락을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20세기 최대의 소설이라면 멜빌의 <백경>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신문에 부고(訃告)한 줄도 돌린 적이 없지 않은가.

한용은 선생은 당시 죽고 난 뒤 백년제(百年際)에 이르러 찬란한 조명을 받는 일 등이나
 한국 시단에 금과옥조처럼 지대한 영향을 미친 1200년 전 당(唐)의 두보 선생은 당시의

시선집에도 끼지 못하는 천대를 감수하면서 고단한 삶의 길을 노래했지 않았는가.
 그러나 송강의 <관동별곡>은 두보 선생의 <북정>을 <사미인곡>은 두보의 <가인>에서 바탕을 살피고 있으며 윤선도의 <몽천 요>는 두보의 <봉 선현 영회>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자서(自序)에 기록되어 있다.
 


 김소월 선생 또한 당시에는 중심 문단과는 먼 아웃사이더였고 윤동주 선생도 생전에 몇 편의 동시를 발표한 것이 전부인 사실은 익히 아는 일이 아닌가.

한용운 선생의 시 또한 1965년 -

40년 후에 박노순 인권환의 [한용운연구] 발간 이후에 빛을 발했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미국의 여류시인인 [“Emily E. 딕킨슨”]은 평생에 단 시(短詩) 1775수를 그렸지만 생전에 발표한 작품은 7편에 불과하지만, 사후 55년에야 그의 시는 미국 시단의 앞자리를 점했다.

아웃사이더(outsider)의 공통점은 오로지 작품을 위한 열정뿐이지 다른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문학 내면으로 들어가는 정열이 낳은 결과가 뒷날의 명성으로 이어진다는 예로 드는 것이 정석이라 할 것이다.     


 동족상잔(同簇相殘)의 참혹한 6.25를 겪었지만,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같은 전쟁 명작이 없는 이유나 사랑은 도처에 있지만 고전<춘양전>을 능가하는 사랑 문학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의 문제를 천착(穿䥣)하는 사고가 없었으므로 간과하는 일이 될 것이라면 눈을 밖으로 돌리는 시선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의 문학을 돌아보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현실 상상 창작은 자유를 먹고 길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유 속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확장성에서 개인의 예술혼을 윤택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창작이라는 점에서 자기의 도량보(度量保),

그리고 자기의 성안에서 문을 열고 과거의 모습을 지우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은 정신인 것이다.

문학의 본질은 사상의 실현이고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소설이 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하여 의미로 만드는 비유가 시가 된다면 자기라는 본질에 대한 “창작, 찾음은 결국 문학적 표현의 깊이와 유관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넋두리로 자기를 감추는 것은 현실의 창작 문학적 깊이와는 너무나 멀어진 상태인 것이다.

 
 문학 본질에 소홀한 태도의 문제는 결국 허방에 빠지는 놀이에 불과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당장 화려함을 추구하고 얼굴 내밀기 바쁜 문단의 허세에 대한 발 빠름보다는 자기 내면의 길로 들어가 고독과 외로움을 감내하면서 오로지 작품만을 위한 헌신의 태도일 때 언젠가는 화려한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예를 검증하고 굳건한 절차탁마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나의 개인적 생각이다     

아웃사이더(outsider)를 다시 말한다면 사회의 기성 틀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사상을 지니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등식을 따지기 이전에 정신의 바로미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1편의 시를 그리는 분석은 언제나 뇌 수의 조력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아웃사이더로 생활한다면 무슨 문단이 필요하고 문학상 등이 뭐 요하겠는가?

이 문단 저문단 기웃거리며 활동하던 시절이 그제 같은데 지금은 조용한 산속에서 종합적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이 더욱 쏠쏠한 재미가 있다.     

물론 곰삭은 깊이와는 다르지만 정서균형의 안도감과 언어에 탄력의 요리 솜씨는 없다 하나 언어 운용의 진정성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감각이 더 많은 진전을 갖는다고 믿기에 독자가 바라보는 사선에서 필자만의 상표를 부착한 독특한 시가 생산되리라 보면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섭리를 따르는 필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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