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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서정적 이미지 관리 하기]

{진솔한 이미지의 서정}

1. {시의 표정이란}

[필자]
























시는 바로 시인 자신들이 모든 이야기를 함축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진솔하고 일생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의 특성은 곧 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면서 과거와 미래 현재의 표정을 관찰하는 방법이 다는 점에서 진실의 기록인 것이다.

물론 시적 특징은 함축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과거, 현재 미래까지 응축이 내포되는 것이다. 즉 서정은 오로지 현재라는 시점에서 조망(眺望)의 기교를 만나야 하기에 독자는 언제나 내면으로 통하는 길을 지키는 긴장(緊張)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를 그리면서 긴장은 독자나 시인이나 필요한 덕목이다. 시인에게는 언어의 탄력이 필요한 이유이고 독자는 감동에 따르는 정서의 환기 현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의 배열이나 생략 등 시적인 기교와 장치의 여부에 부응하는 종합적인 성분이 좌우되는 일종의 인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로 재료로 하여 감정을 부추기는 일이 곧 시의 필요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시인은 늘 언어의 무게를 따지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다양하고 소재의 특성을 들어야 한다. 자연 현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소재로 등장하고 삶의 방법이 그 나름대로의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생의 깊이를 방문하면서 나오는 원숙성이라 할 것이다.

이는 고뇌의 젊은 날이 지나면 느끼는 사물과 대화가 친숙성을 더하는가 하면- 이는 주로 회고의 정념(情念)으로 나타났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소재도 희소한 것도 사실이다.

가을과 겨울 감각이 이를 뜻한다면 초목의 시적 대면이 많은 이유이다. 사실 도시 중심의 정서가 아닌 전원의 추억이 영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정서가 많은 것은 이는 여린 생을 살아온 여적이 보이고 자식을 키우고 난 이후의 썰물에서 느끼는 허망이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2.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1) 사랑과 그리움


사랑은 그 자신의 쾌락을 구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 헌신이 자리할 때 그 마음에 찾아드는 신기루이면서 오아시스가 되기 때문이다.

순간에 자리 잡는 특징은 대상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이를 영원의 장막으로 가릴 때, 사랑은 따스한 이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계는 우선 그리움이라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푸른 이름을 가진 사랑의 정원에 들어간다면 거긴 행복한 나라의 이름을 얻는 자유가 다가오는 듯하다. <여린 마음>으로 시작된다. 여리기 때문에 무언가를 의지하려는 발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탁의 갈증이며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 다다른다.


여름로 내딛는 자줏빛 노을이

맑은 푸르름을 지천으로 토할 때

그리움에 짓눌러 붉어진 눈

하늘거리는 바람이 헤집고

마음 지나니

정녕 그대의 전갈인지

슬픔 가득 여린 마음

의탁되어 푸름에 실려 온다.


                             <여린 마음>


시간은 여름을 재촉하고 또한 황혼 무렵에 푸르름 지천으로 토할 때 그리움에 짓눌러 붉어진 눈 -

그리움에 채색된 처절한 의탁이 화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대의 전갈”처럼 착각되는 시심을 자극하면서 그리움을 불러오는 느낌이다. “슬픔 가득”이라는 비극적 무드로 진행되면서 “여린 마음”을 점령하면서 출렁이는 정서가 그대에게 향하는 전가리 된다. 무엇을 그리는 정황으로 보아 슬픈 이름으로 연상이 된다.

자- 그러면 시인은 그리움의 비극의 확실한 중심에서 시를 만났고 이는 실재가 아닐 수도 있고 실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는 상상의 산물이고 상상력으로 포장된 시심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정서가 지향(志向)하는 방향은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사고의 일종일 것 같다. 이는 성격과 상상이 결합하여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거기서 푸름의 위안과 평안을 쟁취하려는 의도가 앞서며 의탁하는 내면을 보게 된다.

유진영의 시는 실재 모습과는 달리 또 다른 상상의 그리움을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푸름의 계절에

왜! 외롭고 그리운지

싱그럽고 푸르른 계절

온몸으로 포용해

새들의 울음소리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사랑의 영혼들과

멍 때리는 작전에

넋 잃은 몸부림을

모두 끌어안고

그대 5월 여왕 되고 싶어라


                                     <5월 사랑>  


“그대”라는 미지(未知)의 대상과 5월은 늘 연결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연결과 본질 -

5월은 새싹의 푸르름이 녹음을 전하고 있다. 5월 사랑을 그리워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대체한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리고 이끌려 시인의 정서가 6월의 여왕으로 멍~때리는 작전에서 그리움의 넋을 위로한다.

사랑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꿈꾸는 최종 종착지일 것이다. 사랑은 모든 이들의 추구하는 종점이고 인간 삶의 궁극이기 때문에 사랑의 실현은 곧 5월 사랑의 가치로 환산한다.

이상향이면서 자유의 중심인 곳을 멍 때리며 관조하는 매취 되는 언어에서 상상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여왕의 사랑이라는 상상이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하늘 별』 『연가』 등은 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하다


하늘 별은 그대 사랑

묶여 있어 자유가 그립다.

사랑이 있고 없고

그대는 아름다운 빛깔로 나타나

마음 흔들어 놓고 산란한 봄바람에

울렁증 생겨 내 삶의 자아를

하늘 별에게 묻고 물어

사랑의 이름으로 하늘별로 뜬다. <중략>


                                                         <하늘 별>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마치 하늘 별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소중한 다룸에서 연결된다. 사랑이라는 하늘 별이 고귀한 천상의 별은 이미지 이면서 상승의 가치 앞에 신비감을 더해준다.

별에서, 사랑의 이미지는 무게를 갖는 울렁증이 생겨 자아를 묻는 것은 효과를 극대화해준다.

유진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과 사랑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굳이 현실적 연관을 갖기보다는 미지의 공간을 향하는 의식적인 상상으로 유추된다. 물론 명료함의 시의 본질은 아니나 모호성(Ambiguity)이 시적인 본질이지만 의미(意味)의 일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지에게 묻고 답하는 것은 어느 상상의 풍부한 사상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시는 과학적인 의미의 구축을 가져올 때 비로소 언어의 다양성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서로 다른 표정과 같다.


상상만 해도 수줍은 미소

온몸을 감싸고 내 성안에

온몸으로 부딪쳐와 상상으로

열린 하루가 부푼다.

난 그만

당신의 포로가 되어

행복의 닻

그리움으로 실어 내리고

애틋함으로 밀려와

바람으로 싱그럽게

그대가 달려온다.


                                                  <상상의 그리움>  


어느 대상 앞에 자신이 작아지는 것은 사랑의 진수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에서는 자기(自己)가 없으며 오로지 대상만이 크게 다가오므로 진실함이 넘치는 사랑에서는 자기 자신이 대상에 포함하여 내포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과 경륜은 진실한 공간에서 행복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대를 향하는 이름만이라도 “당신의 포로” “수줍은 미소”에서 행복이 충만해지며 내 의식의 성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설렘의 하루가 행복하다.

이는 포로 에서의 구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망아(忘我)의 경지가 아닐까?


2) 관계 설정의 정(情)


부모라는 것은 마음의 고향이고 안식처이기에 꿈을 저장하는 암시를 나타내면서 돌아가 의지하고 싶고 모태의 대상이다.

그러나 부재한 부모일 경우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와 정회(情懷)가 더한층 부풀게 된다.

이는 누구나 갖는 보편성의 마음이면서 이를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일지라도 애틋함이 더하게 된다. 유시인의 경우 『“어머니”』 『“생의 삶”』 등은 과거 지향성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애틋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 있기에 어머니를 연상하는 마음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껏 살았습니다.

꽃이 피면 꽃인 줄 알았고

저며오는 마음만이

깊숙한 어느 곳에

맺혀만 있었습니다.

아련한 그 얼굴

보일 듯 말 듯

그저 솟구치는 그리움만입니다.

그리움 매달아

점점 커가는 빈자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머니>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의 마음을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머니 마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진수이기에 더욱 절절한 세월의 아픔인 것이다. 채우고 또 채우려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언어에 구구절절 미어지는 애저 한 마음이 언어 속에서 춤을 춘다.

『“보일 듯 말 듯”』 『“그저 솟구치는 마음” 』 등 감정이 이입되며 감정의 절정(絶頂)이 행방을 알 수 없는 묘연함 속에 그저 상상으로만 그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지금도 알 수 없다는 뜻에서 사랑으로 가는 영원한 길이라는 상징에 이른다.  


3) 삶의 길


사람은 살아 있기에 현실에 대응하고 여기서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기 위한 상상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이는 오늘이라는 뒷받침이 없다면 인간이 역사는 공허한 이름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내일을 맞이할 가능의 시간을 확보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비록 하루살이의 인생일지라도 거기엔 진지와 탐색 그리고 성실한 책임, 소임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생애가 흘러가듯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살다

하강 곡선을 그리네.

인간은 만물의 동물이듯

죽음의 그늘 벗지 못하고

세상만사 삶의 터전 준비 중

죽음의 길로 가는 우리 삶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삶의 생>



우주의 장구한 시간에서는 수유(須臾)의 찰나이지만 마지막 가는 날까지 인간이 가는 과정을 아직도 우리는 미로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가는 죽음을 붙잡을 수 없기에 언제나 가족의 임무 가정의 임무 자신의 임무를 떠안고 살아 가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유시인의 『“오리무중”』이라 하며 죽음의 그림자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사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을 형이상학적으로 인간도 이 지구상에 태어나면 결코 나갈 수 없는 운명적인 존재라는 뜻에서 시가 상승되는 듯하다.  


바람 자락에 가버린다 해도

밉지 않다.

세찬 바람에 홀씨 되어

사랑의 분신을 준다.

그리움 매달아

커 가는 빈자리로

날려 보내는 홀씨

모두 내어 주고

허탈한 미소로 사각이며

흔들릴 뿐이다.

긴 들녘 저

빈 들녘 그믐달

서러운 듯 윙윙거리며

서러움 달랜다.


                                               <억새풀> 중


마음이 공허할 때 고독은 다가온다고 한다.

이는 자기 발견에서 느끼는 일이기 때문에 자각의 농도에 따라 공허의 함정이 나타난다.

고독은 그렇게 다가오며 바쁘거나 힘겨운 젊은 날 세월에 언덕을 넘느라 고달픈 시절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에 모두 짝을 찾아 저마다 떠나고 나면 비로소 자아의 발견-

여기서 고독이 깃드는 것이다.

『“허탈한 미소”』 『“서러움이 윙윙 거린다”』 등 이는 시인 자신이 그믐달로 형상화하여 서러움을 인생에 대입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비록 늙어진다는 것은 고독의 맛도 강해진다는 뜻 일게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가 된다는 애달픔이 짙어지고 이러한 경향들이 인생의 허무와 손을 잡게 된다.

빈 들녘의 그믐달을 연상하면 이러한 징후는 마음 깊게 공허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4) 나가면서


시는 대답을 말하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 길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독자는 감동의 추수(追隨)를 거둔다. 이는 개인차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의 해답은 시를 살아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한 편의 시에서 해답을 얻을 수도 있고, 문제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유진영의 시에는 해답을 얻는 일보다는 문제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황혼의 풍경화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생의 모습이 액자로 담겨 있기도 하고, 추억을 찾아가는 아슬한 이름들이 나타나는 삶의 애정에서는 깊은 정감이 드러나고, 부모의 사랑이 따스함으로 회고될 때, 인간의 세계가 새삼 포근해진다. 이는 오랜 연륜의 생에서 비롯되는 맛깔이라는 점에서 마치 옛정에 그리움이 넘치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기는 차분하고 자기를 관조하는 어조(tone)의 시인인 듯하다.

다시금 필자도 추억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고 느끼며 나가려 한다.  


2023. 09.


[금요저널 주필/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자]


[필자 저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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