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시인이 그리는 세상)
시인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노래하고 부대끼고 또 느끼면서 생각한 일들을 상상력의 의상을 입혀 자기의 캔버스를 물감으로 채운다. 어떤 사람은 노란색을 선호하고 또 하늘색이나 빨강 등등 기호에 따라 그림 위에 색채를 아름다움으로 위해 필사의 작업을 한다.
자기의 개성을 온새미로 발휘하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무채색의 개성을 나타내는 평범한 화가도 있다. 말을 달리한다면 그림의 모든 평가는 시인 자신으로 돌아가는 자기 책임의 한계 속에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란 허락받고 나온 것이, 아니듯 삶의 펼침도 자기 책임의 성안에 문제요. 성안에서 오로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아마도 시라는 대상도 시인이 선택한 업보(業報)로의 명칭이지 누가 강권해서 명찰을 단 것은 어니다.
개성이란 개인의 표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그리고 자기가 색칠하고 오로지 자기 몫의 독특을 위해 신명을 발휘하는 상상의 작업이다. 근거의 논리와 현실성의 바탕 위에서 길을 재촉하는 여운진 시인의 생각은 독특하면서도 합리적인 발상의 상상적인 토양 위에서 출발한다.
상상은 사고의 바탕 위에서 시작하는 일이고 공상은 전혀 연결고리를 갖지 않을 때 허공을 떠도는 낯선 이방의 이름일 것이다. 시는 상상력의 원천에서 출발한다.
여운진의 시에 들어가는 입구는 호쾌하고 상쾌하다. 구불거리는 길이 아니고, 일직선이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며 단도직입적인 이유가 내장된다.
이는 앞에서 서술한 개성의 독특성이 문패를 달고 방문객을 맞아 드리는 인상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여운진의 시 입구는 여느 시 들과는 달리 다른 방도로 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의 중복과 혹은 겹침을 통해서 또는 이미지의 분해를 통해서 표현의 본질에 접근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쉽게 입구나 출구를 알아내는 것이, 어지럽다고 느끼는 이유도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을 더 했을 때 허락하는 이해 -
이는 여운진 시의 특징이면서 이미지의 다양화라는 분산 효과 앞에 그만의 문패를 달고 있다는 개성의 뜻이다. 이제 그의 표정을 확인하는 길로 들어가 보자
2. 시의 걸음들
1) 풍경 그리고 공허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무게를 갖고 산다. 어떤 삶은 바람에 휩쓸리는 가벼움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또는 중후함으로 무게를 느끼면서 사는 사람 등등 저마다 다른 중량을 갖고 살아간다. 이런 무게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는 점에서 대인관계와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무게가 무겁다, 해서 인품이 출중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또 가볍다 해도 인격의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자기화의 삶을 의미로 엮어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개성의 귀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젊은 날은 날뛰는 무게이고 중년이면 생의 의미를 얻기 위해 나그네의 여정을 소화하는 시간을 보낸다. 스스로 찾아온 노년의 삶은 점차 가벼워지는 의식의 공허가 찾아와 서글픈 뉘앙스를 보내는 것이다
나이의 사다리는 높아질수록 반비례의 무게 앞에 허전을 느끼는 일이 누구나 갖는 현상일 것이다.
어둑 살을 늘리는 가을 초저녁
객 손이 오려나
역마의 울음
천정이 가물가물한데
치맛자락 끼얹는 색바람
소매 끝에 젖는다
마음 한 녁 차치하는 휑한 심사
이웃, 마실을 보낼까?
가을 밖
가을 밖을 나오니 가을이 젖는 억새밭
은발 결이 쓰러졌다, 이우는 쓸쓸함
가을 저녁을 귀가해버린
사람 발소리 뜸해진 땅거미 속으로
뒷모습 사라지는 여름날들
차지도 풍경 옛 같지 않은 억새밭
가을이 쓸쓸하다는 하단 사람들
나는 알 것 같다.
<공허 일기>에서
시의 공간은 가을이고, 시인의 자세는 객관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가을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에, 깊은 명상의 바람을 불러오려는 주문을 건다. 이리하여 휑한 심사/이웃, 마실을 보낼까를 궁리하는 태도에서 가을은 점차 쓸쓸해지는 기운이 시심의 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시는 두 번째 의미에서 시인과 계절이 동등한 키를 세우면서 “하단 사람들/ 쓸쓸함에” 동조하는 가을 풍광의 아픔을 풍경화로 걸어 두려 한다.
물론 그 풍경화의 쓸쓸함은 나이 가벼운 시절의 정서와 보폭을 함께하는 이유가 늙음에서 찾아오는 바람 소리의 가을에의 길을 연상하게 된다.
가을 풍광은 소소한 그림자로 길게 이어지는 스산함이 노래를 부르고, 떠나려는 바람길의 분주함에도 발길 빠름이 가을 색으로 물들이는 길이 넓어지는 듯하다.
시인은 이런 분위기에 가을 색을 입히면서 그의 시심을 고아함으로 맞아 드리려 마음의문을 열고 가을 경치를 즐겨 구경한다.
풍경은 정조가 담기는 것이기에 보는 사람의 마음이 반응하기 때문에, 거기엔 가치의 개념이 들어 있을 수 있고 또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반응을 보이는 것.
여기서 지혜의 문은 열리고 앞을 바라보는 시선에 반응의 결과는 문을 열고 기다리는 것이다. 가령 햇빛은 바다에 가면 바다의 빛으로 살고, 산에 가면 초록의 임무에 헌신하고 인간의 땅에 내려오면 온갖 생명을 키우는 자애를 실험하다 돌아간다.
물론 과학적으로 분석한 햇빛과 시인이 받아 드리는 햇빛은 이처럼 상이한 반응에서 노래의 곡조가 시인만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개성의 투사가 시의 표정으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갯바위 치는 파도 물거품
아스라이 깨지는 수많은 물 알갱이
햇볕에 빤짝빤짝
갈매기 빛 까먹는 바닷가
눈 따가워
갯바위 달라붙어 바다 눈빛
뜯어먹는 땡볕
햇살에 반사되어 파도는
뒤집어도 빛나는 바다빛 알갱이
썰물 빠진 해안가
빛 알갱이 쪼아대는 한 낮
눈 다물어 반짝이는 백사장 밟아
빛 따가운 맨발
빛 알갱이 신는다
<햇볕 잔치>에서
2) 소리의 길
세상사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소리의 갈래를 구분하는 일은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 예민한 개가 듣는 소리와 인간이 듣는 소리의 강도에 따라 청각의 감수성 즉 자극 역(db)의 역수로 나타나는 소리는 저마다 다른 db의 범위 내에서 듣고 말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인간의 소리에 한계로 살고 개는 개의 한계로 살아가는 것은 저마다의 생존에 적합도를 의미한다. <우수 소리> <춘정> <달빛 소리의 풍광> <세상 의미> 등은 소리에 대한 추적이 시화로 표현된다.
찰박-찰박
놋대야 물 달 첨벙 달 장난 넘치네.
철벅 철벅
달 퍼담는 두레박 달빛 소리 넘치네
철컥- 철커덕 우마차는 달빛 감는
흙먼지 뽀얀 신작로 따라가는 소리
따-악 따-악
야경꾼 나무 판때기 달빛 때리는 짝짓기 소리
칙칙 폭-폭 칙칙폭폭
달빛 끌고 강릉 가는 야간기차
석탄 차 덮은 달빛 펄럭 날리는 소리
간이역 완행열차 달빛 따라가는 여음
꿈속 같다. 휑한 달빛
그 달빛 풍광들 어디가 닿았나.
<달빛, 소리의 풍광들>
소리가 풍경을 만드는 것은, 시인의 자질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풍광일 것 같다. 전자는 상황의 뉘앙스라면 후자는 보이는 것에, 대한 단순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구분을, 시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예민성의 정서가 앞장을 서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른 사람보다 더 촉수가 날카로울 때, 구분으로 작동되는 기능 – 여운진의 촉수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단계에서 청력의 기능이 적용되는 인상이 짙다.
아이가 장난으로 소리 내는 “찰박찰박,” 달 퍼담는 두레박 소리의 “철퍽철퍽”에서는 다소 넘치는 소리의 강도가 보이고, 우마차 달빛 감는 “철컥 – 철거덕”에는 힘겨운 무게의 반응이 담겨있는 것, 같은 소리라면, 야경꾼 마을 지키는 소리는 “따-악 따- 악”으로 도둑은 물러가라는 예방의 소리로 전달되고, 석탄 차 덮은 달빛 펄럭이는 소리엔 “칙칙폭폭”으로 음의 강조가 조절되어 실감을 갖는다면 완행열차의 느릿느릿 흐르는 혹은 꿈길을 지나가는 휑한 경치의 소리, 또는 데포르마시옹의 감수성으로 “소리가 달빛 속에서” 저마다 다른 전달력을 갖는다.
정리하자면 달빛이라는 공간에서 사물들이 어떤 이미지로 변화의 정경을 연출하는가를 확인하는 셈이다. 여운진의 시에서 이런 이미지의 출몰은 읽어서 금세 이해되는 시가 아니라 한 단계를 높이는 지적 유희 – 그런 놀이에 접근해야만 하는 이유가 눈을 감고 달빛을 포장하여 생각을 깊이로 내려가는 길 찾기 – 그런 소리이다. 그리고 뉘 넘어가는 시절 이래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3) 별 혹은 공허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독자를 위함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위안의 근거를 찾아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숲에 들어가 자기만족을 위한 목적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독자는 그런 시인의 모습은 감동받을 때, 시인과 독자와의 소통은 달성될 것이다. 고심참담한 언어의 선택이나 표현을 보편화하기 위한 이미지 구축 등은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또 다른 의도가 첨가된다. 여운진은 고독한 시인이다. 그 고독을 숨기고 안으로 다독이는 모습이지 겉으로 꺼내어 보여주는 고독이 아니다. 그렇다면 숨기는 고독의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감추면서 사는 경우가 있고 또 드러내어 보여주는 과시의 고독이 있다. 어느 형태로 나타나든 이는 개인적인 통로 -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에 불과한 이유일 것 같다. 시인의 대답은 결국 그의 시가 말하는 길 찾기이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있지
어딜 가나 따라와 있지
늘 그 자리 그리운
날 기다려, 있지
그리움이란 높고 먼 고독
난들 없으랴 외로운 별 하나
다 타고난 천성인 것
오 – 아득하여라
구천, 구장 천 별나라여
그 별 하나 채워지지 않아
비워지는 허공
보이지 않아 밤하늘로 뜬 그리움
마음속 있어 더 멀고 먼
낸 안의 고독이여
<내 안의 별>에서
어떤 시인이나 일정한 목표 혹은 좌표를 설정하고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여 경주한다. 별이 되기도 하고 먼 이미지의 햇빛 혹은 바다 등 시인 개성에 따라 다른 목표물은 시심과 연결 고리를 갖고 자기의 시를 이끌고 간다.
왜 그런가 하면 시와 삶의 동일성을 이룩하기 위해 자기만의 목표와 창조의 이미지 -
오보들레르의 조응(Correspondances)이나 Pverlaine’s 운율(melobies), A, Rimbad 견자(Voyant.Seer), SMallame 무한(lnfinte)등은 그들 시의 목표의 도달점을 갖는 성 만들기의 일환이었으니, 일제 치하의 냉혹한 시대를 탈출한 이육사의 무지개나 한용운에 님의 추구는 결국 그들의 시에 정점을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으니, 시인마다 그런 목표의 상징이 있기 마련이다. 여운진은 고독의 심연에서 구원의 메시지가 별이 된다. “외로운 별 하나/ 다 타고난 천성인걸”의 고백은 결국 고독의 깊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움이라는 온화한 공간의 추구가 뒤 따라오는 듯 같다.
시인에게 고독은 필연이다. 벗어날 수 없는 의상이기 때문에, 그 고독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살피고 또 다른 공간으로 의식을 이동하는 길을 찾아 나서는 나그네의 행로가 부여되기 때문에 참된, 의식의 자유는 바로 고독 속에서 나타난다.
만약 고독을 벗어난 시가 있다면 이는 장바닥의 소음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시인에게는 고독 – 슬픔의 고독이 있고 또 즐기는 고독 등 고독의 양상은 시인의 개성과 밀접한 관계망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시인의 고독은 내면으로 슬픔의 강이 흐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어딜 가나 따라와 있지”에서 “그리운”이 기다림으로 서 있는 대상과의 만남이 승화의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고독이 도구로 사용되는 인상을 준다. 때문에, 시인은 별이 “밤하늘로 뜬 그리움”이 최종 향기의 대상이면서 “멀고 먼” “내 안의 고독이여”의 발성은 아마도 그의 시가 도달하려는 소망의 정점인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이런 소망은 어느 시인이거나 갖기 마련이지만 열망의 농도가 깊다는 점에서 시인의 고독은 승화의 별이 되고 싶은 열망의 이미지가 빛난다. 별은 천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4) 황혼의 채색
한 권의 시집에 많은, 빈도의 중심 시어가 등장하면 시인과 밀접한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시집 전체 숫자의 10% 정도가 황혼의 이미지가 출몰한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시는 심리적인 내면의 통찰에 의식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상관이 많다. 때문에, 황혼은 시인의 정서에서 중심 목소리로 키워드가 된다는 뜻이다.
<몰랐네> <산 노을> <향가> <그 끝 산문에> <해 질 무렵> 등에 황혼은 분명 시인의 노년 의식이 색채와 관계가 있고 지향의 공간에 대한 막연한 바라보기의 뜻도 첨가되어, 있는 듯하다. 경험한 경험할 것에, 대한 예민한 반응은 항상 시의 중심에 용해되어 감성의 문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황혼은 오늘의 시인 모습이 될 것이고 또 내일로 향하는 예감의 조짐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잎사귀에 비를 얹어
서북간 산 숲 오솔길이
빗 물밴 풀 깃을 말리며 석양을 끈다
밤색 날개 뻐꾸기의 노래 무너진 산
적송 가지 청산의 묵시록을 쓴다.
살가운 햇살
일렁이는 그림자 조각 밟아 가며
두메자운꽃 보송한 비단 털 곱게 솎아
초가을 여는 오솔길 그 끝
산문을 기댄 서쪽 내가 보였다.
<그 산문 끝에서>
가을 자락에 선 시인의 모습이다. 고즈넉한 산사의 조용함이 오히려 눈물샘을 끌어내는 풍광의 고요 그를 따르는 소리 들리는 길에 황혼은 채색의 임무 완수에 종소리 따라 산 아래 내려갔고 이런 정경을 멍히 바라보는 백발이 바람에 날리는 아픔은 슬픔이 아니다. 산 자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이고 고아의 미를 비극미에 접근하는 듯 느낀다. 뻐꾸기가 산을 울리는 늦은 봄날의 저녁 어스름히 산천은 비어 있음이 오히려 가득 차 있고 가득 찼음이 비어 있는 것 같은 불가의 공과 색의 의미가 공존하는 세상은 이미 달빛이 길을 재촉하는 시간 속에서 시인의 모습은 여전 명상의 길 소요하는 모습에 물이 들어 붉은 색채의 결합-
어디로 가야 하는가의 인간 필연의 물음에 길을 잃은 것 같은 정경이다. 아마도 시인의 가장 느낌이 승한 이미지 군을 발견하는 일이 황혼의 시들이 아닌가 한다.
3. 에필로그 –정신 줄 찾기
시인은 인격을 가졌을 때, 비로소 바른 중심을 잡는 정신을 그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인격이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의 줄기를 세우는 작업이 곧 시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뜻에서 보면 비록 언어의 서툴러도 정신의 빛이 곧 시가 된다는 뜻이 된다.
시인의 시는 이미지 숲을 우회하는 특성이 있고 이러한 점이 직선으로 이해를 돕는 것이 아닌 점에서 어렵다는 말도 나올 수 있겠다.
그러나 한 껍질 벗기고 나면 그 안에 알찬 의미의 노래를 만나는 일은 즐거움이라 하겠다.
미처 듣지 못한 소리의 여행이나 별의 속삭임에서 꿈을 이어주는 매개자의 역할과 황혼으로 정신의 그림을 그리는 화백의 솜씨처럼 시인의 깊이를 안으로 숨기면서 태연한 척 일상을 지나는 속이 깊은 시인 -
그런 시의 노래가 합창하고 있다. 특히 연작시는 시인의 원숙한 정신에서 건져 올린 화려한 군무, 폐부로 다가드는 경구의 속삭임이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줄 것이며 독자의 귀를 열어 즐거움을 맛보는 일을 권하면서 평의 책무를 내려놓으려 한다.
2025.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