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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詩 표정]

{시는 숲이 되어야}

금요저널, 강변일보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的論이라는 언어를 표현하고 일반적으로 말을 할 때면 대체적으로 멋지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풍광이 근사한 풍경에서는 자못 감탄사를 詩로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현상은 詩가 일상에서 꽃이거나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온다는 사고의 길이 열릴 것이다.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詩的이다 하면 다소 詩가 갖는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느 순간에 멋진 사람, 혹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이라 칭하고 소통을 하는 것이다. 하나 시적인 사람의 풍모와 경치와는 달리 정작 詩를 쓰는 당사자는 그와는 반대와 상반되게 고달픔, 혹은 고통을 호소함을 흔하게 발성한다. 글을 그리고 만드는 작가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목적과 꿈이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창작과 심미를 운위에 힘쓴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하여야 하기 때문에 시인의 운명은 결코 시적인 탄성과는 달리 험로의 길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고행자의 길인 것이다. 하여 여기에 왜!라는 의문사 앞에서며 고달픔과 아픔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아픔을 제거하는 일이 보편적일 테지만 왜 그런 아픔과 상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길을 가려하는가?

이에 해답이란 잉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장 아픔과, 고통, 상처를 받으면서 잉태하는 것이 반복되면 곧 멋진 글, 아름답고 사랑이라는 말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詩는 또 그렇게 잉태되어야만 품의로 포장되는 것 일게다.

작금의 시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많은 양으로 팽창하고 너도 나도 시인이라고 지칭하는 사회가 되었다.


詩를 창작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의무 교육에 명찰 달기처럼 맞춤법도 모르는 사람이 시인의 이름을 달고 가장 이곳저곳 잡지에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또한 시집도 분주다사하게 발간하면서 대가연하는 일이 요즘의 풍경인 것 같다. 문제 아니 요점은 왜 詩를 쓰는가의 목적의식이 나변(郍邊)에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길이 아닌 권력과 금품의 굴레에서 자신을 한껏 높이려는 풍경이 연출되는 풍경이 참으로 안쓰럽다고 할까 이다.

이제 겨우 40여 명의 시인 논을 쓰고 있는 본인도 아직이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인의 작품, 수필작품, 소설, 시나리오 등 내 나름대로 섭렵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목적 존재 가치에 대해 풀어놓으라면 함량 미달이라 본다. 그러나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소감은 예나 지금이나 정작 진정한 시인의 작품은 매우 희소(稀小)하다는 결론에서 아쉬움과 공허가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왁자한 시인의 작품도 읽어보면 다소 실망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작품의 과다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올곧게 투척된 작품이 없어 음풍농월의 한가한 작품에서 그저 그렇다는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가들은 많지만 걸맞은 작품에서는 낮은 수준의 모습을 실망으로 교환이 된다는 뜻 일게다. 시인들의 문학 가치가 희소성이 결여된 작품들을 모두 체에 걸러서 블라인드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가치가 넘치는 작품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이다.

물론 평론의 부재와 공부와 연구를 하지 않는 학자들의 수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도 사실일 것이지만, -



아무튼 "의식의 평준화‘라는 문제를 직시하고 깨달으며 허상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우리 문단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번 같은 푸념이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지부에도 젊음의 창작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지체가 높고 나이가 많다 하여 돌려 막기 식으로 지부를 운영한다면 과연 얼마나 창작의 의미가 부여될지 캐션 마크이다.

끼리끼리 노는 지부가 아니라 많은 젊은 시인들을 물색하여 창의적인 발상으로 지부가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절차로 앞날이 기대되는 유능한 젊음에게 바통을 넘겨준다면 지금보다 더욱 활발한 지부가 활성화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지부의 장을 내려놓으면 고문으로서의 자문만 하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 방식의 지부가 되어야 하지만 필자가 속한 지부는 아직도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노는 작태가 한심스럽다.

자신들의 언어적 운위와 심미를 가려내는 풍부한 양식이 되어 도약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창작의 지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차원 5차원 나노 시대로 접어드는 이때 안내문, 회의록 등을 아직도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뒤에서 모두 코치하고 관여하는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재차 강조 하지만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지부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시인들의 표정이 수척하다면 이는 시인들의 임무가 방기(放棄)되었거나 지부의 풍토는 잡초 밭의 이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의식의 평준화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틀을 깨는 것이 바로 지부를 살리는 길인 것이라 본다.

1. 봄바람 자리 <김영미> 봄바람은 무게는 없고 의식의 존재는 있다고 한다. 하나 그것을 증명하려면 허무 앞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람의 이름이 아닐까? 바람도 여러 가지 천태만상이다. 샛바람,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봄바람, 등의 이름이 많지만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람, 공기, 세상만사 이치는 의미가 있을 때만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春 봄은 꽃바람 여름 더위 바람 겨울은 눈 꽃바람 흔들린다.

 사뿐 시리아! 가벼워라 <꽃바람 김영미>무릇 봄이 오면 꽃이 향기로 발산하고 존재를 알리며 이를 옮겨주는 바람이라는 것은 이면의 함축이 들어 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 또는 시각적인 이름으로 다가오는 터이고, 겨울에는 눈 꽃바람의 이름도 바람에 의해 실상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이 것들이 시인 앞에 다가올 때 그 가벼움의 감탄은 통찰에서 갖는 "흔들린다"와 가벼움뿐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때, 나타난 의식의 결과물이 /"아 가벼워라!/ 로 정리되는 것이다. 김영미의 시는 보여주는 것에서 느끼는 것으로 변환하면서 감수성을 빨아 드리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2. 마음의 자아 <박시연> 시대가 변해간다. 이른바 시인도 변화되어 마음의 실상을 각인시키고 시각적, 자아의 애고를 정립하여 일반 대중들의 독자를 감동시키는 詩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 정상적,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상을 어루만지는 작가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학은?

심미를 볼 수 있는 판단과 혜안이 있어야 하지만 아직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시어의 詩가 그렇게 풍요롭지가 않다는 것에 허전이다.

모든 시인들은 마음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나타난다. 마음이 나를 버렸나 보다 가슴이 조이고 조여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언제나 조바심이다 마음의 자아가 마음의 자아 <박시연> 마음의 Ego를 정립 못하는 것에 세상을 조바심으로 보는 마음이 안쓰럽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지도가 있는 것이기에 순간순간마다 참음과 인내로 지나고 있는 것 일게다. 좌고우면 할 틈도 없이 재촉의 호흡이었던 박시연은 이제 마음의 자아를 본 것 같다. 신들린 사람처럼 살아온 일생을 살아오다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오순에 더불어 마음을 들여다보니 마음이 자기를 버렸다고 한다.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조바심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기를 보여주는 일에는 주저할 것이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은신하고 은폐하는 속에서 자기를 얼마만큼 보호하느냐에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으로서의 표현은 결코 자화상 즉 마음을 그리는 작업이고 자기를 철저히 개방함으로써 진실의 숲(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의 목적 설정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자아는 나를 버렸다.라는 보조 장치로 삼고 나를 보여주는 일에 일탈을 하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며 나를 변명하는 일로 펜을 내려놓는다.



2022. 08. 16.


금요 저널, 강변 일보 주/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인

[고히한 서정적 정서 자아의 꽃들]
청아한 고귀의  채색된 사물의 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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