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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고 틀어 쓰기 표현력】

《글쓰기의 미학》

1. 시인이라 함은 시를 쓸 때 비로소 시인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이다. 이 황당한 논리는 결국 시인과 시의 관계를 말하는 최초의 설정이고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시가 무엇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글을 접하곤 하는데 참으로 난망할 때가 많다. 시인되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의 상황이 점검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상식이나 언어의 구조적인 특성은

[ego의 봄 소식]

차치하고라도 심지어 맞춤법을 모르는 처지에도 버젓이 시인의 이름을 갖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데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여기엔 상업적이고 사회적 지위를 도외시할 수 없는 영세한 잡지 운영의 이유를 들어야 할 것이지만 아무래도 시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는 원인을 맨 앞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자고로 시는 표현이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은 산문이나 일기하고는 다 개념이다.

일상적인 비유를 남들이 쓰는 말, 혹은 썼던 언어를 버리고 자기만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할 때, 고뇌가 있고 공부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비유와 대상의 간격이 폭력적으로 멀리 있을 때 신선감감과 탄력감을 얻을 수 있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묘비에 다가선다. 그것은 구름보다 투명하고 우유처럼    

하얗게 석탄처럼 하얗게 또 벽처럼 하얗게

                                  

  <Robert Desnos> 『밤의 자살자』 중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의 시인 것이다.

사물은 서로의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에 힌것은 검은 것에 닿아있고 -

이로 보면 끊임없는 인연의 줄기에서 세상은 서로 결합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떠날 때의 만날 것을 믿습니다.” 의 역설 또한 폭력(이질적)이고 석탄처럼 하얗게’를 강제로 결합하는 직유의 폭력성에서 신선미는 더욱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난해의 그물에 빠지는 것과는 다름이 있는 비유라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지적 충족을 위한 탁마를 꾸준히 해야만이 나올 수 있는 표현이기에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만네리즘(Manierism) 매너지즘(틀에 박힌)이거나 제자리 돌기라는 초라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시의 대다수 현상이 이런 처지라면, 변화를 위한 깨어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시의 표정은 밝기보다는 오히려 우울한 표정을 관리하는 일이 진행형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자기 성찰의 돌아봄이 있어야 하고 또 자기 변화를 위한 노력이 지속적일 때. 사는 변화를 꿈꾸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김광수의 『동행』 ‘Assistance’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은 멀지 않고 시간을 단축시킨다.

이런 일은 인간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갖는 본능이 아닐까

북쪽으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 먹이나 물을 찾아 이동하는 짐승들의 무리는 뭉쳐야 한다는 본능이면서 생존의 현상이다.

하물며 인간에 이르면 더욱 선명한 행동양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같은 학교라는 동문의식, 혹은 같은 마을에 산다는 일, 혹은 사회의식, 국가의식 등은 모두 행동의식의 통일성을 뜻할 것이다.

공동묘지에서 산역이 마무리되길 기다리면서 망자도 생각해 보고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통하여 살며 맺어진 인간관계의 끈을 본다. 오늘만은 모두가 하나인 것 같다.

다시 산야를 둘러본다. 한 곳에 멈추어 섰다.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에 수많은 참새들 한 무리를 이뤄 날다 풀밭에 앉고 얼마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반복한다. 어떻게 저리도 하나 빠짐없이 모두가 동행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나 먹을 것을  찾아서 아니면 따뜻한 곳을 찾아 나서라도 누군가 앞장서서 이끌며

 잘 따르고 있음이다. 혼자만 살려하고 이해득실 따져 따로 살려한다면 저런 결집을 못 이룰 것이다.


                                                   김광수 『동행』   


의식의 일치를 이룰 때, 함께 의식은 발동할 것이다. 더구나 목적의 합치를 이루면 같은 공간의 지향 혹은 같은 보조의 행동이 나올 수 있게 될 때, 더불어 공존을 향할 수 있게 된다.

‘인간관계의 끈’ 인간의 공동보조를 이루기 위해 떠난 자를 그리워하고 애도하는 점에서

‘오늘만은 모두가 하나인 것 같다’는 미지의 헤아림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예증은 하늘을 나는 참새 무리의 비상 -

인간의 행위와 동일함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 속에는 동일 목적을 위해 앞장서서 이끌고 가는 리더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음이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체온나누기의 전형을 시화했다.


3. 김신중 『풍경소리』의 하모니         


바람의 모습은 바람이 말하지 않고 오로지 타의에 의해 바람의 이해를 돕게 한다.

나뭇잎에 걸리는 흔들림에서 바람의 소식을 듣기도 하고 파동을 이기는 물살에서 바람의 이름은 들려온다. 더구나 풍경소리의 먼 파문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 결국은 바람의 이름이 대신해 주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오로지 느낄 수만 있는 바람의 확인은 의식을 깨우는 사람에게 들리는 소리 일 것이다.

           풍경은 제 몸을 두르며

           바람이 있음을 알리네

           나도 오늘 내 몸을 두드려

           그대 사랑 있음을 알리고 있네

           내 몸에는 오동나무 있어

           사랑의 노래 숨어 있으나

           아직은 바라는 것들이 많아서    

           몸을 비울 수 없네

           그대 사랑 알릴 수 없네

           어스름 저녁이 되어

           누가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면

           어둔 문을 열어

           내 몸을 비울 것이니

           뜨거운 숨결로 나를 흔들어

           그대 사랑 있음을 알리게 하네


                                   『풍경소리』


바람은 시적 화자의 의식을 전달하는 비유일 것이고, 사실은 시인의 사랑을 전달하는 공명을 위한 비움이 있다. 악기는 비어 있기 때문이다. 악기는 비어 있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비어있음에서 채움이 나오는, 빈 수레가 무거운 짐을 꿀 수 있는 바큇살은 결국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움이 자리한다는 뜻이다.

사랑이라는 신기루도 비워야 전달되는 소리의 파동이라면 시인은 이런 이치를 오동나무를 비유로 사랑의 전달을 상징하고 있음이다. 내 몸을 비울 것이니’의 결과는 사랑의 채움이 자리하기를 소망하는  -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은 구체성을 갖지 않고 영역을 넓히는 상징의 암시만 남을 때 의미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4, 황영순『일어서라 손 내미는 사랑 앞에서』 갈구하는   종교시는 종교적인 생각을 앞에 내세우면 이미 시가 아니라 기도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상을 감추고 은유의 옷을 두껍게 입으면 종교의 한계를 벗어나 일반화된 의미를 남기게 된다.

T.S 엘리엇의 종교시는 3류 시다는 단정은 바로 종교의 한계를 벗어나는 자유정신의 시를 말하는 뜻인 것이다.

시는 자유의 무한을 숨 쉬는 점에서 종교의 한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 뽑아 버렸습니다.

           온몸에 박힌 듯

           그렇게 단호히 뽐을 줄 아는

           마음 있기에

           비로소 깨끗한 정경입니다.

           틀린 길 버리고

           새 길로 접어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

           죽음에 대비하고

           남은 인생 소중히 가꾸기 위한

           나는 지금 달라지고

           바뀌어졌습니다.


황영순 『일어서라 손 내미는 사랑 앞에서』


나를 구원해 준다고 믿는 절대자 앞에서의 기원은 항상 엄숙하고 근엄한 분위기 -

여기서 자기를 찾고 자기를 곧추세우는 일을 신의 뜻으로 받아 드린다.

물론 자기중심의 사고에서 신을 대칭으로 놓으면 나의 변화는 곧 신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이는 사랑이고 은혜일 수 있다. ‘못’ - 죄업의 뿌리를 버릴 것 – 황영순의 지혜는 신의 곁으로 가기 위한 ‘새 길로’의 이미지를 남긴다.

타성과 혼란 그리고 불확실한 것들을 버리고 신의 사랑에 이름을 획득하는 순간이 된다.

신의 얼굴은 언제나 근엄한 하나의 얼굴이지만 희로애락의 변화를 따르는 인간은 기준자를 잃고 방종하는 일에서 옮음을 추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각성의 메시지가 시인의 가슴으로 전달될 때 기쁨이 일렁이는 것이며

글쓰기의 미학이 살아나는 것이라고 개인적 사고라고 느끼며 에필로그 한다.


2023. 03.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칼럼집]


 [고된 삶의 늪]
[그옛날 출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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