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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감각의 특징과 감수성】

<1. 추상적 숲 속 거닐기>

늘 평범하고 추상적 언어 감각이지만 시라는 특수성을 볼 때 이것은 곧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어느 경우든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료한 개성의 척도에서는 애매모호성이 너무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각주(脚注)가 많은 T.S Eliot의 황무지를 읽으면 그 나름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독자는 일단 난해의 딱지를 붙이며 돌아서는 것이다.

하여 우리 김소월의 시를 읽을 경우 쉽게 아는 척하는 이해가 문득 다가든다. 김소월이나 엘리옷은 분명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가치를 빛내는 점에서 달리 해석을 섞을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경의 이상의 <오감도>를 명쾌하게 설득의 자료로 내보이는  평론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너무 황색저널리즘 <인기주의> 고착의 명성을 부추긴 일면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시는 시 같아야 하고 산문은 산문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각주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비유의 장치나 시 적 포장을 걷어내면 속살이 드러나는 의미의 맛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구상화가 있다. 대체로 처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추상화의 숲을 거닐다 구상화의 밭으로 걸음을 옮기고 다시 추상 공간의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시도 마찬가지라 보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질적인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으며 일테면 특징을 이루는 표정을 말한다는 점이다.  

  

시인의 원고를 일별(一瞥)하고 난 느낌은 추상의 숲을 지나는 느낌이고 마치 이중의 기교가 특이하다는 인상이다.

이제 그 표정을 한번 만나보기로 하자.

시집 《골목길 서사》는 총 5부 100편의 시는 이길여시인의 의식 조감(鳥瞰)이 서사로 그린 듯하다. 서사란 현실의 특정한 시간과 과정을 시간의 앞뒤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그의 시를 보면 어느 때는 마음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듯 촉수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지는 듯 정서가 이어지고 묘미가 다채롭고 신비하다.


<2. 길에서 만나는 추상의 표정>


바실리 칸딘스는 순수 추상 예술의 선구자로서 표현주의, 미술을 발전시키고 음악가 바그너의 선봉자로서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탁견(卓見)을 실천에 옮긴 추상 수채화의 화가이다.

정신의 고도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 추상은 일종의 변환 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공로를 갖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만의 정서를 점과 선, 면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문법은 찬탄을 이어오는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시에서도 이런 기법이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신 영역의 한 축을 감당할 때 일정한 자리를 갖는바, 시인의 창조 기법은 그런 측면으로 볼 때 가까움을 느낀다.


휘몰아치는 산길 고당으로 돌아가니

이마를 맞댄 지붕 아래서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다.


고행의 삶의 소리가 내 마음 긁고

때마침 눈물방울 달고 서서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눈길이 간다.


제 키보다 큰 담쟁이에 기대

한숨과 울먹이는 아이와

자아 속의 내가 함께 한다


그을린 마음 달래려 가까이 서서

미소로 그려 준다

양팔을 벌리고 선 아이의 그림자에

깃 고운 날개가 펼쳐지고


그새 배시시 웃는 눈망울 내 세상 어디를

크게 흔들었고 쉽사리 재울 수 없는 뭉근한 떨림에

선뜻 돌아서지 못해 서서히 거꾸로 걷고 있다.


                <산허리 천사의 눈> 중


시적 공간은 협소한 산골의 상징에서 화면은 거친 목소리와 더불어 고단한 삶의 목청에 담긴 아픔이 눈물방울 달고 나오는 아이와 마주친다. 그리고 아이의 한숨과 울먹이는 모습이 시적 화자인 나의 개입은 시간의 테이프를 먼 곳에서 가까이 화폭을 전환하는 기법을 구사하면서 위로의 승화가 천사의 날개를 그려주는 그림 속에 펼쳐지는 날개의 바람으로 “그새 배시시 웃는”에서 현실 공간에 화려한 채색이 마음 밭을 보여준다.



시의 기교나 그림의 기교는 천의무봉(天衣無縫)할 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경계가 없음에서 경계를 만들어나가는 재미는 시인의 능력으로 귀환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서의 파편들이 부유하면서 언젠가 결합하는 요소로 작동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대상의 표현은 시인의 심리적인 경과에 따라 특징이 드러난다. 가령 습작기에서 원숙기로 들어가는 도정(道程)마다 삶의 굴곡이 들어 있으며 이를 심리적인 기제(基劑)로 나타낼 때 추상의 묘미는 복잡을 단순화하는 형태로 정렬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액센트릭 한 요소를 배제하고 화면 내에 형태적 질서에 예술의 자율성을 구성한다. 결국은 시인의 정서적 특징과 정신의 자유 구가에 한몫을 다하는 에너지의 창출일 것이다. 시인의 정서적 공간을 추적해 보자


잘 달구어진 여름 한낮의 길을 신기루가 덮는다

그 속으로 영혼의 무게조차 가누기

힘에 부친 누군가가 그늘을 거느린 나무에

기댄다.

.... 약....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더 울어야만

나를 한 겹 누구를 위해 벗어낼 수 있을까?


                 <매미의 여름 나기> 중


전반에는 객관적인 서술이고 후반에는 주관적인 이미지가 작동되며 전반엔 보여주는 것으로 풍경의 느낌을 독자가 용해시키거나 아니면 간과하거나 유념할 사항이고 후반엔 매미가 곧 시적 화자인 ego로 들어오는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둘의 교합에서 자기를 대입하면서 사는 일이 이치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이 기교는 선명한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또렷한 비교 가치로 승화한다.

이 시인의 시는 그냥 무심코 읽으면 혼란이 올 수 있으나 다시 깊게 읽으면 네거티브 필름에 빛을 쪼이면 포지티브(양화)로 선명한 윤곽이 나타나는 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결국에는 독자가 이를 이해하느냐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3. 메신저의 굴레>



새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으로 옛날부터 고귀한 존재로 인식을 키워왔다.

애 그런가 하면 인간은 늘 하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 하늘을 지향하는 정서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로 향하는 꿈의 이름이기에 비행기는 다시 로켓이 되고 미사일이 되면 이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로 위협을 하고 있고 달 혹은 화성이나 우주의 유영(遊泳)에의 꿈을 실현하는 시작의 실마리는 바로 새에 출발점이었다.


밤나무를 집으로 정한 새들

잠에 취해 뭉그적대는

나를 알람보다 먼저 깨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나와

나뭇가지를 건너 딛고 제가끔 넘놀며

재잘거리며 새들을 쫓는다


서로 깃을 다듬어 주다

한 마리가 가지에 걸린

햇살을 쪼아 먹자

너나 할 것 없이 따라 하고

나도 눈 시늉을 한다.


시나브로

입꼬리가 슬몃슬몃 올라가도록

내 마음도 몰랑몰랑 해진다.

순한 생명들의 열어 놓은

새털 같은 아침에 마냥 빠져들어

짝다리 짚은 다리에 쥐가 놀아

옴짝 못하고 서 있다.


           <하루를 새와>  


1연에서 새와 나는 부지런한 새의 울음이 깨우는 관계로 이어진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취하기 때문에 새는 자기 생존 방법으로 일어났지만, 시인으로 다가온 의미는 잠을 깨우는 역할로 축소되고 있다.

시에 2연에 따르면 새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는 아침의 동반자로 설정되어 사이좋은 새들과의 관계에 시인 또한 동화되어 새의 행동에 동반자로 변한다. 이러한 감염(感染)의 정서는 “몰랑몰랑”해지는 마음의 상태는 새로부터 받은 정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하면 새들이 열어놓은 풍경 속에서 시인은 망연함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그림으로 걸린다. 새와 시인의 관계망은 “좋음”을 유지하고 미래를 재촉하는 보폭이 시작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인가는 모르나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끌어내는 논리를 굳이 설명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 혹은 사물을 노래하는 자이지 해석을 하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고요하여 누군가 떠올리기 맞춤한 풍경이다

갑자기 바람 한줄기 무심히 지나고

인정사정없이 톡톡 터지는 기억들은 입가에 한숨을 몰고

콧등이 매워지게 한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잊었다 여겼던

네가 살고 있었다.


멀고 먼 시간을 돌아 내게로 오는 사람 하나 있다.

하여 나는 기억의 불을 밝히려 눈 한 움큼 뭉쳐

설 등 하얗게 매달아 놓는다.


                                           <기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바람으로 시작한다. “갑자기 바람한줄기 무심히 지나가고”로부터 의식의 창문이 열리고 이로부터 물길이 터진다.

그리하여 잊었던 “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존재의 이미지로 환생하면서 나와 관계의 과거가 문이 열리게 된다. 즉 그 사람의 모습을 인지할 때, 이 시의 모티브는 바람의 촉수가 일깨워주는 시발점으로부터 시인의 의식이 충동하는 역할의 바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면의 세계를 깨우는 바람에 의해 외부로 나타나는 기억의 전달자가 곧 바람의 힘이 될 때 시인은 비로소 길을 꺼내는 시작이 작품으로 창조의 길이 나타난 셈일 것이다.


<4. 에필로그>


그의 시 “어떤 그리움” “희망 사항” “기억을 찾아” “하루를 새와” 등을 보면 창조의 기법이 액자(額子) 기법이 있다. 풍경을 그리고 다시 그 속에서 풍경이 들어 있을 때, 감상의 묘미가 길을 넓힌다. 시는 꽃과 자연의 모습이 보이고 향기가 하늘로 오른다.

이는 연상의 꼬리가 따라 이어질 때 풍경을 만들고 다시 전체의 풍경이 아름다움을 생성하면서 여운(餘韻)을 남긴다.

이런 특징은 시적 강조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지배소가 되는 사물 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아름다움의 연출은 언어 감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모자이크로 짜 맞추는 미감은 성숙의 시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시로서 인생을 말하고 자연을 그리고 심중의 깊이를 풀어내는 기교는 곧 언어의 운용에서 탁월한 미래를 기대하는 요소가 되면서 창작의 시를 “액자 시” “사물 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높이 사고 싶다. 삶의 고귀한 가치가 빛으로 승화하는 상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펜을 내려놓는다.


2023. 03.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생명의  자연 형상]
[자연의  육화]


[이승섭 평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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