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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무게]

{어깨를 펴야지}

아버지는 늘 근엄하고 엄격하고 어머니는 자상함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게 되는 대부분 이렇게 그렇게 떠올릴 것이다. 실상 부모에 대한 추상(追想)은 변함없는 사랑에 한없는 밑음이 작용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하물며 못생긴 이름의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는" 속설이 있다는 것을 보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질이고 원천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비단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물도 다름이 없을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식은 종족보존의 일환이기 때문에 사랑을 본질로 하고 그 사랑의 이름으로 대를 이어가는 길을 한사코 고집하는 것이 부모의 임무라면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라는 통찰은 분명 진리일 것이다. 언제나 사랑이라는 말에 이르면 어머니의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어머니는 사랑의 화신이라는 뜻이 더 강조되며 아버지는 한참 벗어난 개념으로 남게 된다. 아무래도 아버지 임무는 주로 가정의 가장이며 방패막이로의 지금까지의 임무였다면 어머니는 안으로 자식들의 성장에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는 역활론이 개념을 낳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아버지의 임무는 점차 어머니와 구분이 어려운 가정사가 공평분배 쪽으로 이동하여 아버지란 영역이 없어지는 추세가 아니던가?금단의 영역이 이젠 아이를 출산하는 임무만 빼면 오히려 전도(轉倒)된 일상으로 변하는 추세에 적응해야 하는 특히 베이비 붐 세대는(기성세대)(55~63) 더더욱 입지가 좁아진 것이다. 심지어 전통적인 남성 지배되었던 육사, 공사, 해사 등에 여성이 1.2.3. 등을 휩쓴 일은 분명 파천황의 변화임은 분명히 명백하다. 힘으로 보면 약하다는 선입견도 어느새 깨지는 것이 정당하다는 증명이 계속되고 있지 않가. 이러한 근원은 필기구의 혁명에 찾고 싶다. 다시 말하면 남성은 Power가 대명사였다면 pen은 남성의 Penis인 생식기에 근원을 추적할 수가 있다.그러나 컴퓨터의 출현으로 -



사실 최초 컴퓨터는 미국 1946. 완성한 애니악(Eniac)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3년 앞선 영국이 독일군 암호작성기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콜로서스(Colossus)를 영국의 앨런 튜링이 제작하여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했지만, 군사기밀이라 공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승리의 로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볼 수 있다.오늘날 개인용 컴퓨터는 아시다시피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가 1970. 후반에 그들 집 차고에서 만든 이후 인류는 거대한 변화의 재촉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컴퓨터는 필기구의 변화이고 이는 곧 여성의 자판 터치의 유연함이 문명사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볼 수 있다. 이 자신감으로 여성의 영역 확대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짧은 시간 안에 여성의 문화가 남성의 파워(power)를 압도하는 지경에 와있는 것이라 하겠다. 아버지란 현실은 이제 사라진지 오래이며 앞으로 더욱 남성과 여성의 구분일뿐 아버지란 무게의 여원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는 명제 앞에서 역활론이란 아니 현실론이란 무 명제가 될 것임에 아버지도 이제 한쪽의 단면만이 아닌 공통분배 평등주의에 당당히 가입되어야 할 듯하다.아버지란 무게도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보지만 공통분배와 평등에서 그만큼 시대가 바뀌어 가고 60대로 넘어서는 베이비 붐 세대는 이제 아버지가 설 자리, 무게의 중심 추가 이동하는 것에는 우리 세대는 이제 인정을 해야만 하는 시대인 것이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사회에서 천대받는 가치가 추락하는 현실론에 더한층 안타까움일 뿐이다. 아버지라는 입지가 무너져 내리는 현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는 아버지 모두가 한번은 고민하면서 현실론에 따라야 할지는 모두 아버지들의 몫인 것이다.


사회에서 은퇴와 동시 부(富)가 멀어지고 외톨이가 되어버린 현 상황 하루는 이 산에 올라가고 하루는 저쪽 산을 기웃거리며 정제되지 못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울적한 점심을 순대 한 그릇으로 때우고 가정으로 향하지 못하고 저녁을 기다리는 자화상인 우리 아버지들 -



무너지는 가정의 위계질서도 선점하지 못하고 마누라 눈치 자식 눈치나 살피는 이 현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현실론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 필자의 주위를 살펴보니 베이비 붐 세대는 갈수록 어지럽고 복잡하고 미로의 행로를 끝없이 이어가는 길에서 살아가는 일처럼 느끼고 현실을 인정하고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에 즉 자기의 주장이 목청으로 둔갑하고 더 크게 높이는 높은음의 마지막은 찢어지는 비극이 예정된 것처럼 막다름을 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자식들은 어떻게 바라볼지는? 글쎄올시다이다. 바른 것을 추구하면 모두가 응하는 일이라면 분류가 가져오는 비극은 목불인견이다.



정말 부부간 철학의 부재를 심각히 노증(勞症)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견(異見)이 있을 때, 이를 화합하고 조화하는 것은 그래도 아버지 철학이 있어야 하지만 오로지 내 편과 내 것을 많이 확보하려는 일은 결국 언젠가는 수렁에 빠지는 탄식을 불러올 뿐일 것이다.

이런 기저(基底)에서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은 무한 파급을 사회 전반에 갈라침으로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란 판단 앞에서 운용하고 지탱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이를 바로 잡는 어른의 부재 혹은 자기 수양의 철학이 사라진 허무에서 맹목의 질주가 있을 때 자기 부정의 회의가 절망을 낳을 것이다.


이에 처방전은 자기 찾기의 방법에 대한 고민이 사회를 담아내는 척도의 온도계가 되어아버지들은 즉 아버지들이 사회를 수용할 수밖에 없 표현의 길이 없다는 것에 양어깨가 더욱 무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뿐이다.

사실 남부럽지 않게 사회적으로 어깨를 흔들며 활보하는 부류들도 필자의 주위에는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전 우리 세대에는 몇 %나 될까?

어느 조사기관을 살펴보니 우리 세대의 75%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왼손과 오른손은 우리 몸의 일부이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물이 아니라는 자각을 앞세울 때 나의 아픔은 곧 우리의 아픔이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 한 곳도 이런 대척(對蹠)의 경우에서 왜 너는 나와 다른가를 따질 뿐 너는 나의 일부라는 의식이 없는 쪼개기의 현상에 아버지란 의식 속에서 삶을 지탱하는 일과를 어떻게 두려움에서 벗어나 환경이 주는 정서의 가치를 사회 관습으로 볼 것인가는 아버지들의 자각이 필요할 때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필자만일까?


사실 만남 이별등은 서로의 반대말 개념일지라도 생로병사 혹은 우주의 원형이정(元亨利貞)즉 계절의 순환인 만큼 만남은 떠남이 이어지고 다시 만남으로 돌아오는 길이 일정한 궤도일 때 인간은 거기에 감정을 개입하면서 기쁨과 슬픔이 연결되는 것이라 우주의 순환법칙에 따르는 것이 진리일지는 글쎄올시다이다.


봄비가 그치고 봄 햇살이 반겨 주는 오늘 어버이날에 아버지들의 어깨가 무겁고 축 처진 두 어깨가 더욱 나를 짓누르고 있다. 오늘따라 웬지 미상의 고려 청산별곡(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靑山)에 살어리랏다. 라는 작자 미상의 고전시가가 생각날까?  

아마도 필자도 다를 바 없는 아버지 무게 때문일 것이다.  



2023. 05. 08.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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