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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헨님 Sep 29. 2019

후회하지 않으려고 떠올리는 것들

어떤 내일이 기다린다고 해도 말이야,

내가 자주 하는 이상한 생각 중의 하나는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아, 이다.


얕게 고민하여 발견한 이유는 이런 것이다.

1.갖고 싶은 건 대부분 욕망을 묵히지 않고 산다,

2.매일 매일 생일처럼 차려입는다,

3.세상의 끝까지 사랑할 사람을 발견했다,

4.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무척 귀하게 아낀다.

내가 종종 하는 이상한 말 중의 하나는 

엄마가 당장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이다.


엄마랑 나는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건 오래오래 병원에 그저 누워있던 나의 할아버지 때문이기도 하고, 대대로 단명한다는 외가의 내력, 그 안에 기억된 숫자들에 엄마가 가까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엄마는 건강하고, 활기차며 때로 탄성을 부를 정도로 아름답다. 스마트 기기를 잘 조작하며 재미있는 콘텐츠를 찾아내 꼭 찾아보라고 강요도 한다. 한때는 잘생긴 20대 게이 유튜버에게 빠졌다가, 현재의 최애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모 아저씨다.

아무리 도리질을 해도 엄마는 끝내 냉장고에 있는 과일을 깎아 내고, 나는 ‘과일이 몸에 좋다고 누가 그래? 이거 그냥 설탕 덩어리라니까!’하면서, 접시를 다 비운다. 그런 때에, 우리는 꼭 그런 얘기를 한다.


Mom “너무 오래 살지 않겠어.”
Daughter “맞아, 건강할 수 있을 때까지 살다가 가. 오래오래 병원에 누워 있는 거 서로 힘든 일이야.”
M “딱 20년 더 살면 좋겠어. 그전에 여행 한 번 같이 가는 건 어때?”
D “난 이제 같이 안 갈래. 돈 줄게, 아빠랑 가.”
M “아빠랑 가면 재미가 없는데, 같이 가주면 안 돼?”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머물렀던 패서디나의 예쁜 가정집과 소담하게 차려졌던 아침 식사와 렌터카를 타고 아웃렛에 갔던 것, 라스베이거스의 사막길을 반나절 내내 지나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때 참 좋았어, 고마워. 그런 얘기를 맥락 없이 내가 일하는 시간에 카톡으로 보내오기도 한다.


2주간 같이 지낸 미국에서 나는 낮 시간 내내 오래오래 잠을 잤다. 그러다 해가 지면 일어나 차를 몰고 밤거리를 운전해 돌아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엄마는 하나라도 더 보고 싶었을 텐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휴가를 온 직장인이고, 피로를 떨치고 뭐라도 하나 더 보려는 욕심이 없다. 그래서 게으르게,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냈었다.  





이번 추석 때, 먼 곳에 여행을 가 있는데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커줘서 고맙다’


고모들이 나를 그렇게 칭찬하더라고, 자기가 생각해도 참 잘 자랐다 싶다는 것이다. 엄마한테 기쁨을 주려고 했던 시절들이 다행히 정확히 가 닿기는 했다. 공부 잘하는 딸, 좋은 회사에 척척 들어간 딸, 함께 몇 번이고 여행을 다닌 딸이었기 때문에. 모녀 여행을 다닌다고 하면, 다른 아줌마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고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딸들은 얼마나 지 엄마를 구박하는데, 얼마나 무시하는데, 귀찮다고 같이 다니지도 않는데 여행이라니 참 복 받았지, 했다.

엄마랑 만나면 대부분 하루를 내 옷을 사러 다니는 데 쓴다.

“또 내 눈에 익숙한 옷을 입고 왔네!” 하면서, 내가 초라하게 하고 다니는 걸 견딜 수가 없다면서.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한다. 그럼 또 그걸 못 이기고 쉬고 싶은 주말을 포기하고 함께 나서고 만다. 자주 가는 숍들에서, 나는 엄마가 골라주는 옷들을 몇 번이나 탈의실을 오가며 입어 본다. 샵의 매니저들은 뜬금없이 그런 나를 너무 착하다며 칭찬한다. 새 옷을 입고 서서 당장 벗어, 라든지 이건 꼭 사야겠네, 하는 결정을 그저 기다리다가 커다랗게 쌓인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주말은 점점 더 소중해지고, 정말 계절을 바꾸기 위해서만 엄마의 집에 간다.



엄마의 집은,

그건 사실 나와 내 형제와 아빠의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엄마가 시간을 들여 가꾸고 일상을 보내는 곳이다.

내가 버린 구형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보고, 길 건너 건너 꽃집에서 계절마다 화분을 사다 나르는 곳, 나의 다른 계절 옷들이 차곡히 보관되는 곳, 거실 넓은 창 밖으로 매일 엄마가 홀로 보기 아깝다는 풍경을 감탄하는 곳. 거기엔 잘 정돈된 나의 침대와 진정한 환대와 새로 늘린 자랑할 만한 소품이나 연하게 내린 향 좋은 커피,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짜고 달게 조리고 끓인 음식들이 있을 것을 안다. 그러면서 그걸 애써 잊은 척하고 고작 한 시간 거리의 내 작은 방에서 조용조용 잘 논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기껏 지쳐 버리느라 바빠 아무것도 안 할 때도 굳이 굳이 혼자서 시간을 흘린다.


엄마가 죽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일 내가 죽는다 해도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 같아.

겪어보지도 않고 호기롭게 이런 생각들을 잘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참 행복하게 잘 산다고 안도한다. 날 때부터 우울감이라고는 덜어 놓고 나와서 내내 감정의 0점 값을 설렘에 맞추고 살았다. 엄마와 나 자신, 양측 모두 흡족하게 효도를 미리미리 해 둔 것, 항상 나 자신을 아끼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은 잘했다, 싶다. 정말로 당장 우주가 몽땅 사라져도 후회하지 않는 하루를 내일도 살아갈 거야. 어떤 내일이 온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아.


D: 난 정말 잘했던 것 같아, 후회 안 할 거야.
M: 정말 최고의 딸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 맞장구쳐 주는 엄마가 있어서 매일 이렇게 건방을 떨며 사나 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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