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건강하게 하는 수줍은 사람들
그는 사우나를 좋아하고 나는 대중목욕탕에 가는 걸 어색해한다. 한국의 케이퍼 필름을 즐겨 보는 애인이랑 예술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나는 같이 극장에 가는 일이 많지 않다. 어쩌다 평론가 선생님의 GV를 함께 듣는 날이면, 노트를 꺼내 메모를 하는 내 옆에서 얘는 스마트폰으로 야구 게임을 한다.
우리는 드문드문 함께하며 각자의 휴일을 보낸다. 오늘은 사우나 주차장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갔다가, 그를 들여보내고 홀로 영풍문고에 가서 신작을 훑어보았다. 다시 만나 논현으로 옮겨 얘는 미용실에 갔고 나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런 식의 데이트를 자주 한다. 다시 만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어쩜 이렇게 나이를 안 먹니, 아직도 이십 대 초반 같아’, ‘나의 보물, 너를 오래오래 아낄 거야’ 그런 말들을 들었다. 차가 막히면 그런대로, 날씨가 흐리거나 맑거나 관계없이 평온한 상태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다.
최근 느슨한 모임을 추구한다는 북클럽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의도와 또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거기엔 서로 수줍고, 길게 이야기하려면 약간의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다듬어야 하고, 그러면서 꼭 같은 지점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직업이나 이름을 모른다. 각자 가져온 책을 들어 보이고 모임의 앞뒤로 그걸 짧게 리뷰하는 말만 나누고 헤어졌으니.
그날따라 나는 화려한 밍크 장식이 달린 새 구두를 신고, 주차를 하다가 5분 늦게 나타났으며, 무엇보다 평소에 잘 읽지도 않는 자기 계발서와 경제경영서의 아슬한 경계에 있는 책을 들고 온 여자였다. 에릭 로메르와 미학과 히치콕을 주제로 한 원서 책 같은 걸 가져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런 결의 페르소나를 미워하지는 않으나, 어쩐지 변명을 덧붙이고 말았다. 내가 얄팍해서, 삼가는 사람들 사이에 슬쩍 쑥스러웠다.
영화 프로그래머가 공지한 모임인지라, 모두들 시간을 들여 영화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평론가 선생님을 팬심으로 모신다는 것 외에 내가 뭘 알겠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걸 단정하면 거칠 것이 없다. 깊이 있는 생활 예술가들을 만나면 내가 매일 매진하는 일에, 월급을 받는 일상에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었다. 그리고 일면 통쾌해한다. 난 고작 가방을 좋아하는 여자애야, 나는 모르는 게 진짜 많아요, 그렇게 말하는 일. 예전에 속했던 영화인들 모임에서 그런 말을 하면서, 그래도 이 모임이 좋아요.라고 고백했을 때 이런 감탄을 듣기도 했다. “항상 말을 참 예쁘게 하시네요.” 아, 이런 심성 고운 예술가들 같으니.
힘써 어색해지는 동안, 마음을 다해 편애하는 내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을 테다. 익숙한 모습으로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자리에서. 그걸 잊지 않고 데면데면한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다 돌아오는 것이 꽤나 머리를 상쾌하게 한다. 인생 친구를 새롭게 만날 때도 있지만, 그냥 이러다 말 거라 해도 조급하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작은 서점에 모여 문학 행사를 하는 모임도 그런 느슨한 관계에 속한다. 각자의 글에 예쁜 칭찬의 말을 덧붙이기도 하고 그 말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한 주에 한 번 모이다가,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본다. 쇼트 슬리브 아래 슬쩍 문신이 있는, 감도가 좋은 프린트물을 만들어 오던 소설가 여자랑, 하이엔드 패션지의 톱 모델 눈매를 닮은 여자애가 내 마음에 담겼다. 우리는 시간이 끝나면 각자의 짐을 들고 사라졌지만, 은근한 시그널을 남기기도 했다. 발견될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사소하게, 짧은 글 안에 살며시 표현하는 식으로. 우리는 밥을 한 번 먹기로 하고 그걸 영영 미루기도 한다. 다음 주에 만나 우리는 또 언뜻 반갑고 내내 수줍은 관계일 것이다.
느슨한 관계의 반대말이 무얼까,를 잠시 고민해 본다.
팽팽하다고 하려니 영 틀린 것 같다. 매일매일 실없는 아침 인사와 맞춤법을 일부러 하나도 안 맞게 쓰는 동글동글한 메시지들. 그걸 주고받는 친구랑 어찌 팽팽한 사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겠느냐고. 퍼지 fuzzy하고, 포근하고 완전 안정적이라, 기계처럼 무얼 꽉 조인 거랑은 너무 멀다. 손깍지를 딱 끼고도 하나도 안 힘겨운 사이와 힐끔힐끔 조심하는 관계가 꼭 반대 지점에 있는 건 아닐 거다.
머리를 자르러 간 애인을 카페에서 기다리니, 슬슬 해가 지려고 한다. 몇 년째 같은 곳에서 스타일을 다듬는 그의 담당 선생님 얼굴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분은 여자이고, 우리가 여행을 엄청나게 자주 다닌다는 것도 안다. 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 그가 대화를 나누며 지었을 웃음과 상황을 떠올리다가 그만둔다. 분리된 각자의 생활 속에 관계는 한결 느슨해진다. 그걸 초조하게 여기거나 바짝 당기려 노력하지 않고 지낸다.
나의 연인은 내 이야기를 듣다가 몇 년째 묻는다. ‘지금 말하는 과장님이 그 결혼한 과장님이야?’ '아니 아니, 그분 말고~' 얘는 내 주변 사람들을 평생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회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상냥한지, 또 농담을 들으면 어떻게 웃는지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영영 알아내려 애쓰지도 않을 테지.
서로 휴대폰 잠금번호를 다 알면서도 그걸 몰래 열어보지도, 밤늦게 상대의 전화가 울려도 묻지 않고 내버려 둔다. 의심하거나 애를 태우지도 않고, 만나면 서로 예뻐하며 진심을 확인한다.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이런 거리두기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대의 귀여움을 쉬이 발견하는 게 장점이고, 그러려면 너그러운 눈이 꼭 필요하다. 바짝 옭아매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게 먼저이고.
그런 사이로 지내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든든한데 산뜻하기까지 해서, 미움이 자라날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