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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헨님 Mar 13. 2022

언제쯤, 무엇이기를

일을 잘하고 싶어서 했던 노력들

 나는 안목이 있는 콘텐츠 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센스의 영역이란 건 일정한 점수나 등급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시험 범위도 모른 채 수험표를 받은 것만 같았다. 뾰족한 감각을 타고났거나 근사한 것만 만지며 살아온 사람은 한 끗 다르게 세련된 것을 만들어낼 줄 알겠지만. 둘 다 해당하지 않았으므로 참 많이 헤맸다.


 앞서 성취해 낸 사람들이 적어둔 것을 모으기로 했다.  업무 중 틈틈이 미학, 미술, 디자인, 아트디렉터, 편집, 아티스트 같은 키워드를 품은 책의 이름을 적었다. 매혹적인 제목을 발견하면 파티에 향하는 마음처럼 둥둥 설렜다. 방에 도착하면 세상 처음 초콜릿을 맛본 아이처럼 흥분 상태로 폭식하듯 읽어 내렸다. 정확히 ‘폭식증’이라는 단어가 자꾸 팝업창이 되어 떠 올랐다. 꼭꼭 씹어 소화시키지 않고 성급히 전투적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많은 인물과 작업이 촘촘히 담겨 있었고, 취향이 좋은 자라면 진즉 알았어야 할 것들을 시기 늦게 인지했다. 훌쩍 깊어지지 않았으나 방향을 정하기 위한 온점이라도 하나 똑 찍은 기분이었다.   


 관심사가 넓어지고 깊이 탐닉한 것은 평론가가 쓴 글들, 각 분야의 평론가들이다. 입사 첫 해, 내 직업의 정체를 파악하면서 때때로 고개를 드는 열등감, 그것의 반작용이었다. 나는 ‘고작 잘 파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가끔 시시한 물건을 하이-엔드인 것처럼 드높여 카피를 쓰는 것도 남몰래 괴로웠었다. 그래서 ‘잘 팔리는 것’과 가장 끝단에 있는 것을 남은 한 손으로 꼭 붙잡고 싶었다. 그게 비평인 것 같았다. 팔리지 않는 글, 대중에게 잘 읽히지도 않는 글, 그러면서 온통 고매한 지식과 수준 높은 학문이 꼭꼭 들어찬 것. 그 정체를 지치지 않고 알아내면 그나마 멀쩡하게 자존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헤매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기대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디자인, 건축, 문학, 음식, 책, 음악, 역사, 정치 등 각 분야에 정평이 나 있는 비평가들을 한 번씩 만날 수 있는 아카데미 과정도 발견했다. 유일하게 모든 강의에 전부 출석한 사람이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강의실 한 구석에 몰스킨을 펴고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적지 않고 돌아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철저한 무지함을 두른 내가 무엇을 건져내기엔 너무, 깊은 영역이었다. 그런 경험은 열등감으로 번지지 않고 의외로 뒷맛이 개운하다는 것을 공감할는지. 세상엔 탐구하고 힘써 추구할 것이 아주 아주 많이 남아 있구나, 그런 마음으로 강좌를 듣고 있자면 심술 맞은 선배라든가 잘 풀리지 않는 회사일 같은 건 아득하게 쪼그라들곤 했다. 시시한 것, 그 따위 일상 아무렇게나 되어 버리라지, 마음이 단단해졌다.


 당시 나는 사전제작팀에서 짧은 영상을 만들던 신입 피디였고, 나름 콘티도 짜고 내러티브도 표현하고 하찮은 감각도 부리며 지냈다. 스타일리시한 영상이라며 칭찬을 받기도 해서 텍스트를 사랑하는 마음 한쪽을 비디오에게 내 주리라 다짐한 시절이었다. 무얼 모르는지를 몰라서 자신만만하던 나에게 ‘나의 선생님’이 나타났다. ‘많은 영화 비평가가 있지만 그는 한 명이다’라는 소개와 함께.

선생님의 강의는 통째로 아트였다. 선생님의 존재에 비하면 어느 종류의 셀럽도 다 시시했다. 몇 년간 그분을 따라다니며 영화의 씬과 시퀀스와 의미와 제작과 구성과 시대성과 모티프와 아름다움에 대해 들었다. 선생님의 일정을 조용히 좇으며 소리 죽여 감탄하고 남몰래 전율한 저녁이 쌓였다.  


  나 자신이 고작 가격표나 헤아리고 전자 편지나 적고 있는 존재가 되었음에 괴로운 순간이 올 때마다 선생님을 찾았다. 늘 활발하게 활동하시고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곳에 나타나 주셔서 은혜롭다고 안도하곤 했다. 선생님이 생각나 가슴이 벅찰 때마다 남긴 에세이들. 최초로 진지하게 쓴 시도 선생님에 관한 것이다. 그걸로 유명 시인에게 칭찬도 받았다. 내가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예민한 존경의 끝단을 경험한 것이 거대한 영향을 준 것이리라. 쉽게 감탄하고 펄쩍 감동하는 이 활활 타는 성정은 그때 심어진 불씨가 타오르며 한 꺼풀 열린 것이라고도 확신한다. 선생님과 문자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 후에도 여전히 신화 속 인물 같이 다가온다.


 어떤 시절을 지나고 있건, 덮어놓고 열렬히 추종하게 되는 사람을 줄줄이 발견하고 싶다.

 언젠가 프랑스의 살롱 문화에 관해 읽고 나서, 미국 드라마 sex&the city의 우정을 동경했던 마음의 정체가 딱 그것이었다고 느꼈다. 가만히 나의 살롱을 상상하는 순간이 많아졌고, 비밀스럽게 멤버를 추려 보았다. 초대장을 보낼 계획도 없이 홀로 꼽은 일방적인 워너-비들이었다. CBS의 정혜윤(책 중독자, 끝없이 감각적인 글을 쓰는 작가이자) 피디, 불교방송의 문태준 (우리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시 중 하나인 ‘맨발’을 쓴 시인이자) 피디를 목록에 올렸다.  나란히 이름을 적어 보니 나도 한 회사의 피디이자 무엇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손 앞에 잡히는 이것이 다일 리 없다며 매일매일 무언가를 꼼지락꼼지락 추구하며 시간을 잘도 흘리며 산다.


 그래서 무엇이 되려나.

 실컷 먹고 이끌리는 대로 즐거움만 따라가다가 몰랐던 장소에 도착해 주기를 모호하게 바라는 게 전부인 것이다.

 언제쯤, 무엇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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