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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플래닛 Jan 24. 2022

집을 빼겠다고 말할 용기

앞이 보이는 내일과 그렇지 않은 내일

1월 22일,

집주인 아저씨께 집을 빼겠다고 말씀드렸다. 정확히는 문자를 하나 보냈다.

주인아저씨! 오피스텔 xxxx호입니다. 아쉽게도 계약 갱신은 못 하게 됐습니다.

아, 나는 곧 이 아늑하고 평온한 집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가야 한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인문학 모임에서 W 씨와 그 전날 나눈 대화가 아니었다면 이 문자 한 통을 보내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저는 가끔 제가 미친 걸까 생각해요.
지금 다니는 회사는 남들 부러워하는 전망 밝은 스타트업에, 위치는 서울에서 가장 비싸다는 삼성역 동네에 교통 좋아,  점심 먹여줘,
월급도 나쁘지 않게 주고, 워라밸도 잘 보장되거든요.
그런데 다른 나라에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여길 떠날 생각을 하다니요.



이런 내게 A씨는 그의 주위에 있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제 동료 또래들은 내년에 결혼을 계획하고 경기도에 집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차를 한 대 뽑아 픽업하려 연차를 쓴다고 말해요. 저는 그들에 비해 모아둔 돈도 차도 집도 없어요. 그런데 떠나고 싶어요. 니체의 말처럼 생존이 행복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하거든요. 다른 나라들에서도 살아보고 싶고 경험하고 싶고,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요.  


떠나려면 지금 바로 제 주위만 봐도 매트리스, 책상, 소파 등 모두 처분해야 하고, 집도 처리해야 하고 회사부터 비자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지금 살고 있는 제 공간, 아침마다 햇살이 아름답게 비춰 들어와 따스하게 글을 쓰거나 그냥 가만히- 눈 감고 있는 그런 행복을 왜 저버려야 할까요?
그냥 편하게 살지....


이런 와중에 며칠 전 신의 장난처럼 사내 팀장직을 제안받았어요. 커리어우먼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 번에 내려놓기 어렵더군요. 반년만 좀 더 머물까 며칠을 고민했어요.
돈도 별로 없는데…


주절거리며 내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고 A 씨가 뭐라고 대답해 주셨는지 지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대화는 내게 바람에 꺼질락 말락하는 불씨를 다시 불지펴 주었다. 10년 뒤 무엇을 덜 후회할 것인지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비로소, 내가 가장 미루고 미루고 두려워 했던 '집'을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일이 년마다 이사를 다녀서 나에게 '집'은 불안과 안정을 결정짓는 너무도 중요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집이 없으면 떠돌아다녀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이번에도 제일 어려웠던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아늑한 집을 내려 놓는 일이었다.


지금은 여러 나라에 살아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막연함을 안고 떠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단한 것보다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발견을 통해 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훗날 나의 탁월함이 되기를 바라며 미친 생각을 실행에 옮겨보려 한다.




Cover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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