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워앤서퍼 Sep 15. 2020

직장인의 귀한 추석 연휴, 밀라노로 날아간 까닭은?

에미레이트 승무원이 될 거야

몇 년 전, 전 세계를 누비고 싶어 한때 가슴에 품었던 승무원에 ‘조용히’ 도전한 적이 있다.

아마 일적으로도 심한 권태기가 왔을 때로 기억한다.  


오랜 고민 끝에 이탈리아도 안 가봤겠다, 가고 싶었던 외국계 항공사 오픈데이 중 추석 연휴와도 딱 맞아떨어지는 이탈리아 오픈데이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오픈데이란?
항공사의 공식 초대 없이 참가 가능한 항공사의 채용 행사.
정말 사전 등록 따위 없이 당일에 나타나면 됨.


항공사 면접 같은 것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나는 직장 다니며 모아놓은 몇 백만 원의 적금을 깨서 주중엔 퇴근 후 실전 면접을 연습하고 주말에는 서울로 올라가 비싼 개인 인터뷰 레슨을 받았다.

한 번 하는 것 제대로 하자며 면접 복장도 제대로 장만하고 친구와 선생님 도움을 받아 프로필 사진도 찍으며 후회가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나날들을 설명하기엔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을 알기에 쥐도 새도 모르게 움직익로 했다.


이른바 ‘밀라노 007 작전’이 시작됐다.


몸을 실어 비행기를 타고 밀라노로 향할 땐 웃기게도 며칠 뒤 있을 면접 보다도 가을의 밀라노를 볼 생각에 가장 두근거렸다.

가을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낮에 카페에서 이태리 사람들이 서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수백 년 된 오래된 건물들을 양 옆으로 낙엽으로 붉게 물든 거리를 걸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밀라노에서 놓쳐서는 안 될 대성당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물로 꼽힌 비토리아 엠마누엘레(Grand Galleria Vittorio Emanuele II) 앞에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비현실적이었다.


나빌리오 운하(Naviglio Grande)를 따라 걷다 아늑한 동굴 같은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땐 나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손님들이 행복해 보였다.  

종종 비가 내렸는데, 나는 낮보다 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비 내린 후 젖은 돌길을 걷다 보면 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보이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연 후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트렌치코트를 입고 한껏 치장한 그들을 보니 영화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짧지만 마음껏 두 발로 밀라노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드디어 오픈데이 당일이었다. 아침에 호텔방에서 열심히 머리와 복장을 준비 하고는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장에는 대기실을 꽉 채울 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다.

북적이는 이태리 사람들 속 그룹으로 온 한국인들도 보였다.

낯선 나라, 환경에서 조금 떨린 마음으로 혼자 앉아 있는데 내 옆에 앉아 있는 이탈리아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방긋 웃어주었고 그녀와 나, 그녀의 언니는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고 말을 섞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였다.  

그녀는 사르데냐(Sardegna)라는 이탈리아 섬에 살고 있는데, 이번 오픈데이가 벌써 네 번째 도전이라고 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오픈데이를 기다리며 일정이 뜰 때마다 이곳에 왔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남이 뭐라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면 그렇게 좇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각자 이력서 및 프로필 사진을 내러 면접장으로 들어갔고

나와서는 또 함께 앉아서 다음 단계를 기다렸다.

차가워 보이는 면접관들과 지원자들 속에서 그녀와 그녀의 언니의 따뜻함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따지고 보니 그들은 나의 첫 이태리 친구들이기도 했다.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그들이 고마웠고, 몇 년째 포기 않고 이곳을 찾아오는 그녀가 꼭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우린 SNS 친구를 맺고 함께 합격한다면 그곳에서 보자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

'

'

'

그리고 같은 해 아랍에미레이트 유니폼을 입은 그녀의 사진이 SNS에 올라왔다.

내가 승무원이 된 것처럼 그녀의 합격에 뛸 듯이 기뻤다.

지금은 바람대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는 참 행복해 보인다.

아시아에도 가끔 오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녀와 조우할 날이 오겠지?

나에게는 후회 없는 도전이었기에 가슴이 아주 후련했다.  

특별한 도전을 함께했던 가을의 밀라노 또한 잊지 못할 것이다.


비 온 뒤 촉촉하게 젖은 밀라노의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