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바라보기
아침해가 구름을 모두 어디론가 보내버렸다.
대신 바람을 불렀다.
하얀 운동화를 꺼낸다.
걷는다.
그리고 오늘의 작은 여행이 시작된다,
운동화 밑창과 길바닥 면이 닿는 소리는 시계 초침처럼 정확한 간격을 갖게 된다.
타박타박 타박타박, 째깍째깍.
조금 더 신나게 걸으면 타타 타다 타다닥!
한 사람은 배가 불룩한 파란 티, 다른 이는 마르고 굽은 등에 등산 가방을 멘 70대로 보이는,
두 남자.
골목에 갈래가 생기는 곳에 비스듬한 건물의 창에 비친 당신들의 모습을 보며 몸을 앞뒤로 움직인다.
마주 보는 건물이 갈래길에 접어드는 45도의 전면창은 마침 비어 있는 상가였고,
의도치 않게 나란히 걷던 그들을 담은 창.
창은 놀이공원에 있는 거울의 집이 되었다.
그것을 봐버린 친구들은
"등을 피려면 배가 나오고,
배를 넣으려면 등이 굽는다.'
창을 향해 눈을 고정하고 아예 몸을 옆으로 방향을 틀고는 연신 몸을 앞과 뒤로 움직이며 짓궂게 웃으신다.
그렇게 나란히 서서 박자까지 맞추는 친구 둘.
차마 계속 시선을 두면 방해가 될까 싶어 내 갈길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가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나란한 친구의 행복감이 나에게 물든다.
살포시 웃음을 베어 물고 길을 걸어가는데
난데없이 큰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누군가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상대되는 사람의 말소리는 안 들리고 무언가를 다그치는 앙칼진 할머니의 목소리.
가게 안이 보이지 않고, 들여다볼 생각도 없지만.
전화통화하는 중인 게 분명하다.
놀란 내가 우습다.
"그러니까 내가 말 안 하냐
~하지 마러. 그 ~ 있~"
마저 들려온 할머니의 잠깐의 소리에서 난 알아챘다. 일상의 언어라는 것을.
시장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발크기만큼씩 걸어가는 마르고 키 큰 할아버지. 오랜만이다. 두꺼운 안경이 굽은 등 때문인지 점점 코끝으로 내려간다. 오늘도 아침부터 주어 모은 고물을 밀고 가신다. 알파벳 "L"자 모양의 손수레는 바퀴도 작은 것 달랑 두 개뿐이다. 느릿느릿 작은 발걸음으로 손수레의 무게중심을 맞추며 전진한다.
예전, 너무 커다래진 수레의 짐을 지나치지 못하고 속도에 맞춰 힘을 보탰던 때가 있었다. 연신 감사하고 연신 미안해하는 할아버지에게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할아버지의 몸상태에 맞춘 움직임에 내가 방해를 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할아버지의 '오늘도 안녕'을 감사하며 인사를 한다. 할아버지는 화답해 주신다. 환하게!
웃음이나 힘듦의 가감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시장상인들은 분주하게 가게와 지나는 사람들을 살핀다.
나도 그들의 모습을 무심한 듯 살피며 걸어간다.
멈추지 않고
한 속도로 직진, 좌회전, 우회전
뒷걸음도, 바로 뒤돌지 않고 걷는다.
푸슬푸슬
기어오른 미소가 아무렇게 얼굴에 걸린다.
시장을 빠져나온 골목, 지인의 가게 간판이 보인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마사지샵엔 '관리 중'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마침 그늘진 가게 앞에서 더위를 식힐 겸 걸음을 멈췄다.
반가운 얼굴은 못 봐도 목소리라도 들을까? 나 왔네 하고 인사 한쪽 문밖에서 던져볼까 고민하던 중.
중년의 여인이 전화통화를 가며 나를 지나친다.
'응, 그래.
당신 오늘 영화 뭐 볼래?'
오늘 이 부부는 영화 데이트가 있나 보다.
아직 말설이는데 어쩜 문이 열리며 나를 발견한 그는 논란 토끼눈이다. 짬을 내 화장실을 가려는 와중에 만남이라 경황이 없다. 급한 불을 끄고 돌아와서는 얼른 히비스커스 티백을 담아 빨간빛이 고운 정이컵을 내민다. 시원하게 마시며 가라고. 반가운데 잠시 시간을 내지 못하는 미안함을 담아 나를 보낸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이 익숙해서 더 재밌다.
화원의 꽃에 눈을 줘버렸다.
'사자!'를 외치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현관에 둘 붉은색을 품은 작은 나무 하나를 샀다. 직사광선이 필요 없는 키가 커질 나무. 가을에 나는 잎은 붉은색을 띤다는 녀석이 다가올 가을에 대한 기대감을 채운다.
레옹의 한 장면처럼 화분을 옆구리에 끼우지 못했지만, 한 손에 안고 작업실로 간다.
하얗게 빛나는 창밖으로 자꾸 눈이 간다.
초록빛이 바람에 사락사락 반짝인다.
달콤한 차향이 좋을까? 그윽한 커피 향이 좋을까?
평온한 결정 장애 시간을 즐긴다.
"내가 줄게 있어. 준다 준다 맨날 그랬는데, 오늘이네.
잠깐 기다려! 내가 바빠서 이렇게 줘.
아니 있어봐.
이거 가져가서 먹어. 응, 어휴!"
창밖이 소란하다.
3명의 할머니. 한껏 부푼 등짐을 내리고 바닥에 앉아서 빠른 말을 하는 할머니 1, 고운 바람막이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반가운 낯빛의 할머니 2, 궁금함에 구부정 몸을 낮춘 할머니 3.
할머니 1의 등짐에서 나온 나물들은 직접 뜯은 것으로 보인다.
"좋네, 더 줘! "
숨이 죽어 양이 적게 보였는지 할머니 2가 말을 얹는다.
할머니 1은 ' 이것도 많아, 나도 먹어야지' 하면서 가방 안에서 연신 무언가를 꺼낸다.
그러자 할머니 3은 '뭘 자꾸 끄내? 만났으면 됐지'한다.
애교 섞인 타박과 우연한 만남의 반가움과 나눌 수 있어 고맙다는 것이 반복되는 대화는 바쁜 듯 한가롭다.
해가 진다.
바람을 두고 해가 먼저 작별했다.
작은 물병에 미지근한 물을 채우고, 하얀 운동화에 발을 넣는다.
담 위에 뭉게뭉게 얼굴을 뭉치고 있는 빨간 장미가 나를 일제히 쳐다본다. 볼 빨간 웃음을 남겨주는 것이 나의 인사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 가로등이 번쩍,
내 앞에 가로등이 번쩍, 연이어 길 중간에 있는 가로등 2개가 커진다. 나무와 건물로 좀 더 어두운 곳부터 불이 켜지는 건가? 노란 불빛이 내가 걷을 길을 밝히는 이 순간이 해사하다.
저절로 걸음이 느려진다.
타닥 타다닥, 작은 발소리가 다가온다.
9살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를 지나치고, 발소리의 주인공이 뒤를 쫓는다. 6살쯤? 여동생이 더 속도를 내자 언니는 몸을 뒤로 돌린다. 이내 언니 품에 폭 뛰어 안겨 얼굴을 부빈다. 내 뒤에서 ' 천천히, 천천히'하는 엄마의 목소리.
다시금 타닥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엄마에게 달려간다.
초등학교 옆 광장과 놀이터엔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즐기고 있다. 10대 무리는 역시 튀는 공처럼 소란스럽다. 부산하지만 멋쩍은 듯 인사를 건네는 순수함이 예쁘다.
혼자, 둘이 또는 가족끼리 나와 걷고 뛰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모두 편안해 보인다.
다시 걸어 골목으로.
허리를 숙이고 박스를 접어 작은 카트에 쌓는 할머니는 아직 더 일을 할 심산인가 보다. 각을 맞춰 올린 종이 박스의 높이가 높지 않다.
굽은 허리가 일어서도 펴질 않는 할머니의 귀가시간은 언제쯤일까? 지금의 어스름한 시간은 아니다.
곱슬거리는 단발의 여자가 급하게 뛴다. 매달리듯 함께 가는 개는 주저앉아보지만 주인을 멈출 수 없다. 건물을 끼고 돌아드어오니 보인 장면이다. 의아함과 당황이 버무려진다.
어쩐 일인지 주위의 사람들은 개와 주인을 보며 웃고 있다. 제 갈 길을 가며 웃음이 걸린 사람들의 얼굴에 더욱더 궁금해진다.
굳이 묻기도 그렇고 알 길이 없지만, 덩달아 내 얼굴에도 웃음이 걸린다.
나도 나의 걸음을 이어간다.
바람도 햇빛도
먼저 간 해를 대신해서 어둠을 맞이한 바람은 어째 신나 보인다.
오늘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일상이다.
여느 때와 똑같이 고민과 난제가 한가득인 어느 날.
다 미루고 걸어보기로 한 그날.
산책 영화 한 편을 하루 동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