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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Feb 09. 2024

미안해 남편

해봐야 아는 역지사지

영국의 남자 중학교로 시험 감독 아르바이트를 나간 지 이 주일이 지났다. 첫째 주에는 하루에 한 세션씩 삼일을 나갔는데 도합 세 시간 정도 되는 근무시간임에도 집에 돌아오면 피곤에 절어 아홉 시면 곯아떨어졌다. 아니 누가 보면 10시간 근무하고 온 줄 알겠어. 어이없고 민망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삼일동안 아홉 시에 잠들기가 계속되자 슬금슬금 짜증이 얼굴을 내밀었다. 겨우 몇만 원 벌자고 나갔다 와서는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자버리자 내 하루가 홀라당 없어졌단 생각에 기분이 심히 언짢아졌기 때문이다. 내 시간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았다. 싫다. 나 이건 싫다. 앞으로 최대한 남 말고 나를 위한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잠시 참아야지.


그래도 일주일이 지나자 몸이 슬슬 적응을 했는지 피로도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세션씩 있던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에는 두 세션이 연이어 잡힌 날들. 그리고 어제는 무려 세 세션이 잡혔다. 오전 7:45부터 오후 3:15까지 일곱 시간 반을 근무한 거다.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에 집을 나와서 하교한 후에 들어왔다. 뭔가 제대로 워킹맘이 된 듯한 기분이다.


하루 종일을 밖에서 보내고 들어오니 그야말로 ‘퇴근’한 느낌이 제대로 들었다. 그리곤 근무시간에 식당에서 솔솔 풍기던 치킨 냄새를 떠올리고는 KFC에서 저녁을 시켜 먹자고 했다. 되도록 배달음식을 안 먹는 내가 먼저 나서서 시켜 먹자하니 가족들은 ’얼씨구나 엄마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시키라‘며 서둘렀다.


쓰러져 앉아 치킨을 기다리며 그동안 퇴근하고 들어오면  널브러지던 남편을 생각했다. 뭐가 그리 맨날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핑계를 대고 맥주나 와인을 찾던 그의 날들이 떠올랐다. 이런 거였다. 뭔가 종일 애쓴 나를 위해 약간 노티 naughty 하지만 도파민을 뿜뿜 해줄 보상을 찾았던 거다. 어떤 날은 맥주로, 어떤 날은 배달음식으로.


그런 남편을 나도 모르게 약간 한심하게 보고 잔소리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기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다이어트하겠다더니 또 술을 찾는다고, 닭가슴살 먹겠대서 사놨더니 또 피자 시킨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잘 지키며 산다는 것을 뽐내며 우회적으로 깎아내렸던 날들을 반성한다. 몸에 좋은 것들로 자신에게 보상해주면 왜 안되느냐고 핀잔주던 내 입, 맴매하자.


밖에 외출만 하고 돌아와도 피곤한 나이인데 일하고 들어와서 각종 채소를 씻고, 연어 스테이크를 구워 신선한 건강 밥상을 차려 먹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피곤해서 그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배를 채우고 말았던 요 며칠이다.


사람은 그래도 적응을 또 금방 한다. 나도 금방 적응을 할 것이다. 바뀐 생활에서도 나의 건강 생활습관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식단을 미리 짜서 주말에 장을 봐두고 기운 있을 때 밑 손질을 미리 해두어 요리시간을 단축할 거다. 슬로 쿠커를 이용해서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되는 음식을 할 거다. 한 번에 양을 많이 해서 얼릴 수 있는 건 얼렸다가 비상시에 녹여 먹을 거다.


남편이 퇴근 후에 운동을 하지 않아도 나약한 사람 보듯 하지 않을 거다. 혹시나 운동을 다시 시작한다면 엄청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말해줄 거다. 가끔씩은 장단도 맞춰줄 거다. 단호박처럼 냉정하게 고개 돌리지 않고 맥주 한 모금, 와인 한 모금 같이 마셔주겠다. 오늘 특히 더 피곤한 날이라 그렇겠거니 이제는 이해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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