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날 수 없는 무의식의 악몽에 대해서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대한 심리적 해석

by 방구석 룸펜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한 인간의 무의식을 뿌리까지 해체한 영화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장소와 인물들은 어떤 사람(아마도 다이앤이거나 제3의 인물)의 무의식이 창조한 세계를 표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꿈꾸는 자의 욕망과 공포가 투사된 존재이며,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이 그 무의식적 세계 내의 구성물들이기에, 수시로 얼굴을 바꾸며 나타날 수 있다.


영화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혼란스럽게 오버랩되는 몇 쌍의 남녀, 그리고 그들의 복제가 추는 일종의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춤이다. 이들은 서로 접촉하며 현실의 인간과 그림자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간다. 마치 그것은 현실 세계가 제공하는 감각적 환락과 덧없는 소멸이 서로 모습을 뒤바꾸면서 나타나는 것 같다.


영화는 시작과 끝에서 같은 공간 (Mulholland Dr.) 으로 돌아가는데, 이곳은 탄생과 사멸의 기원이 되는 공(空)의 공간이다. 동시에, 영화 속의 모든 사건들이 불규칙한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고 있는 Mulholland Dr.는 베티와 리타가 반복적으로 귀환을 희구하는 장소로서, 꿈꾸는 자가 품은 자아의 핵이며, 그 외의 식당, 모텔 방 등은 무의식의 주변부다.


닫힌 고리처럼 계속해서 재현되는 베티와 리타의 여정에서, 늘 비슷한 시점에 검은 안경을 쓴 괴한(내면의 감시자, superego)들의 위협이나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10대들과 충돌 같은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예정된 비극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끊임없이 Mulholland Dr.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ㅡ 마치 미증유의 이상향과도 같이 ㅡ 그(들) 자신을 구원해 줄 무언가, 즉 '고도를 기다리며'의 Godot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리타는 마치 베티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돌봄을 받는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차량 간의 충돌 사고가 발생한 이래로, 리타는 왜 계속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숨어야만 했을까? 베티(사회적 페르소나)가 계속하여 리타(내면 자아)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꿈꾸는 이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소중하고, 연약한)이어서는 아닐까?


영화의 중반에서 베티와 리타가 가발을 쓰고 서로를 나란히 비추어보는 장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사람은 각각 꿈꾸는 자의 분열된 자아가 가진 이면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수 겹으로 층층이 이루어진 꿈의 구조로 드러나며, 그는 자기자신을 극도로 사랑하는 동시에 죽이려 한다. (꿈꾸는 자의 자기혐오는 다이앤이 카밀라의 살인 청부를 의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간밤의 사건(교통사고)을 기억하면서 같이 배가 찢어져라 웃던 친구의 머리통에 망설임 없이 총알을 박아넣는 히트맨은, 인간의 양면성과 모순적인 충동 ㅡ 사랑하기에 파괴하고 싶은 ㅡ 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언어(의식의 질서)로 설명될 수 없기에 영화 속 살인자의 행동처럼 자꾸만 엇나가고, 사태를 확장시키며, 애초에 계획했던 것을 붕괴시킨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다이앤을 자살로 몰고 가는 섬찟한 노부부는, 그와 반대로 초반부의 공항에서 베티에게 다정하게 작별을 고하며 헤어지는 친밀한 관계로 나타나고, 그것은 ㅡ 실제의 꿈이 흔히 그러하듯이 ㅡ 현실에서 특정한 관계를 맺는 대상이, 꿈속에서는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속성을 갖는 등가물로서 나타나는 식으로, 현실의 위계가 전복되는 전형적인 투사에 해당한다.


그(녀)는 자기-구원의 등치물로서 꿈 속의 베티가 리타를 구원하는 서사를 작성한다. 리타(카밀라)는 그녀 자기자신인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상징이다. 그녀가 이 애정의 상대에게 품는 애증은, 베티가 할리우드에 도착하고 나서 고모의 아파트에 짐을 푼 날, 여러 인물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첫 오디션을 보면서 ㅡ 아버지뻘 되는 중년의 배우와 연기하던 중에 읊은 ㅡ 대본에 있던 마지막 대사인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기 전에."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도심에 있는 평범한 식당, 영화감독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 등에서, 인물만 바뀐 채로 또는 동일한 인물이 다른 역할로 나오면서 반복되는 씬은, 일부러 관객에게 여러 차례 기시감을 준다. 식당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과 호기심 (여러 차례 같은 꿈을 꾼 남자의 편집증적 망상), 악의(거리의 매춘부들을 관리하는 포주로 보이는 건달과 그의 정부) 등의 감정이다. 이것은 한 사건(장소)을 둘러싸고도 인간 내부에 얼마나 다양한 충동들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은유처럼 보인다.


리타(베티)가 우연히 그녀의 가방 속에서 발견하고 나서, 영화가 그들의 손을 통해 몇 번인가 보여주고, 종국에는 베티가 꼭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열어보게 되는 파란색 상자는, 인간(꿈꾸는 자)이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걸려 넘어지게 되는 어떤 사건(의미의 변동)이다. 결국 그 상자를 파란색 열쇠로 열자 지금까지 꿔오던 꿈(의 한 층위)은 마치 신기루처럼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꿈은 (아마도 다시) 새로운 층위로 진입한다.


영화는 한 인물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축조되어 있는지 말하려고 한다. 사랑, 고통, 분노, 절망, 증오, 공포, 예지 같은 수많은 정념들이 얼굴을 바꿔 가며, 같은 혹은 다른 이름으로 되풀이 등장한다. 다이앤은 과연 정말 죽었는가? 혹은, 어쩌면 이 또한 새로운 꿈의 시작인가? 영화는 2시간 반의 러닝타임 끝에 보는 이의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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