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편의점에서 AI와 행복을 논하다
우울한 청년 백수가 언젠가 새벽밤을 보내던 방법들에 대해서
"인생이 중요하다고?
내 길지 않은 평생에서부터, 벌써 더 수십 번은 살아 내기도 하였고,
가증스런 오뇌의 첨단에서
아무려나 죽어도 보았던 것을?"
ㅡ 학교를 자퇴하고 잉여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10대의 룸펜(SJ)이 쓴 일기에서 발췌.
새벽의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옆자리에서 수화기 너머로 음담패설이 오가고 있는 남녀의 통화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삶을 혐오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단지 내가 뜻했던 바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아 지금의 형편없는 꼴에 질렸을 뿐인 걸까?'
이 경우 소멸을 향한 충동은 사실상 일이 뜻대로 되어 가지 않는 데 대한 철없는 투정에 가깝다.
사춘기 이후로 어느덧 만성이 된 우울증은, 내가 가끔씩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한 순간이나, 아니면 역시 가끔씩 찾아오는 슬픔 속에서나, 어느덧 나와 밤낮으로 시야를 공유하는 또 하나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내가 겪어 온 매일보다 나은 하루일 때조차도, 지긋지긋한 권태는 언제나 나를 바닥 모를 수렁 속으로 끌어당긴다.
가증스런 오뇌의 첨단에서......
아무려나 죽어도 보았던 것을......
나의 오래 전 자아 ㅡ 아마도 18세 무렵으로 추정되는 ㅡ 가 남긴 이 문구는, 내 아직 남은 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장이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내가 느끼는 불행의 태반은 늘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 지분에 있어서 적어도 8할 이상은 차지하고 있었다. 과거에 내가 숱하게 저질렀던 그 멍청한 실수들 없이는, 그나마 이제서야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된 지금의 나도 없듯이,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없다면 미래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임에도 말이다.
현재를 즐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몸을 적시고 있는 이 시간을 누리는 것은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이들만의 전유물인가? 만일 내가 미래에 지금보다 불행해지게 된다면, 나는 어쩌면 이 시기를 좋았던 시절로 회상하게 될까?
구글의 Gemini 앱을 켜서 인공지능에게 물어보았다 ㅡ "나는 어떡하면 행복해질 수 있지?"
지극히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고, 매일의 살아있음에 감사하란다.
제길. 말은 참 쉽다. 그게 안 돼서 너한테 물어본 건데.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면 어떻게 해야 돼?"
모르긴 몰라도 A4용지 한 바닥 이상은 되어 보이는 잡설을 블라블라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다가 결론은 항우울제를 먹으란다.
"이미 먹고 있거든?!"
짜증 섞인 스와이프로 앱을 닫고 나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다시 한 번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세상의 비참함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나를 여전히 살게 하는 것들에 관해서......
읽고 쓰는 것. 내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행위.
그 외에도 베토벤의 그랜드 푸가. 바흐의 성가곡.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라벨의 볼레로. 드뷔시의 피아노 소품들. 마일스 데이비스의 <Bitches Brew>... 등등등.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내가 사랑하는, 또는 사랑했던 것들을 되짚어 세아려 보고 있는 동안, 이런 생각이 일순간 마른 하늘의 벽력같이 뇌리에 내리꽂혔다.
'왜 나는 백만년을 고민해 봤자 답을 못 찾을 문제를 붙잡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가?'
내 과문의 소치일지도 모르지만, 머리가 쌩쌩 돌아가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철학자들도, 그 누구 하나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 같은 건 내겐 사치다.
그러니까 운명아, 부디 배부른 돼지의 삶을 내게 선물해 다오. 도축장으로 끌려가게 될 녀석 말고, 개중에 할리우드 스타의 반려 돼지로 다음 생에는 태어나도록.
꼬르륵. 배꼽 시계가 울린다.
사색을 할 깜냥도 안 되는 머리를 불쌍하게도 너무 혹사시켰나 보다.
눈치 없는 위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때 늦은 시장기를 반찬 삼아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오늘은 일단 이걸로 족하다.
면이 불기 전에 먹어야지. 잘 먹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