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9일 18시 02분. 지금 나는 인천공항 246번 게이트, 엔제리너스에 들어와 라떼 한 잔을 시키고 노트북을 켰다. 고개를 돌리면 통창에 파란 하늘과 큰 비행기들이 출발 준비에 한창이다. 영 시원찮은 라떼마저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만큼, 내겐 잊지 못할 여행이 될 것 같아서. 꼭 틈틈이 기록해 보는 걸로!
아차차, 전남편이라는 단어가 썩 유쾌하지는 않아 '그녀석'이라고 언급하겠다. 다른 것들을 고민해 봤는데, 고민해서까지 닉네임을 붙이자니 '굳이' 싶어서 너는 앞으로 그녀석이다. 미안하지만 너와의 이혼 후, 너는 내게 꽤나 오랜 시간 비속어 같은 존재였다. 그치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나는 너와의 이혼을 통해 남녀관계 그 이상의 것들을 배웠다. 이혼했다고 인생이 망하는 일은 잃어나지 않았으며, 무뎌지지 않을 것만 같던 배신감도 결국엔 시간 앞에 무뎌진다는 것. 그리고 세상살이 속에 스트레스받을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역시 가족밖에 없다는 것'. '요즘 세상에 이혼은 흠이 아니라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위로 아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외 나의 모든 오만함에 반성하는 계기였다.
이 모든 것들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배웠다고 생각하니 스물아홉에 깨달은 이혼이 내겐 선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늘 '내가 운이 좋아 대학교를 잘 간 거고, 내가 열심히 해서 경찰에 합격한 것이고, 내가 야무져서 이렇게 좋은 남편 만나 결혼도 했구나.' 하며 모든 오만함을 안고 살아왔다. 어쨌거나 이런 멋진 이혼에 그녀석의 노고를 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 다시는 볼 일 없는 그녀석과 나 혼자 화해해보려 한다. 그녀석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비워야만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수도 있을 테니까. 뭐 적을 사랑하라, 용서하는 자가 위너다 이런 말들이 있던데, 용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다. 그러니 적당히 화해정도로.
그나저나, 스물한 살부터 주구장창 유럽만 다니던 내가 유럽 아닌 뉴욕을 선택한 건 아직 남은 기억들 탓이었다. 신혼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이혼을 했던 터라 아직은 유럽으로 갔던 신혼여행 따위가 추억거리로 남아있었다. 이 좋은 여행길에 궁상떨게 될지 모르는 나를 떠올리니 끔찍했다. 마음이 행복할 땐, 한껏 여유 있는 여행이 간절했으나, 고장 난 마음에는 정신없는 스케줄에 등 떠밀리고픈 생각이었다. 뭐 쉽게 말해 그 좋은 에펠탑 아래 앉아 '개새끼야 엉엉'하며 울고 싶진 않았던 거다.
아, 적다 보니 보딩 타임이 다가온다. 이 뷰를 바라보면서 타이핑하고 있자니 갑자기 울컥한다. 주변에서는 각종 외국어가 들려온다. 나 진짜 공항이구나, 신혼여행 다음이 이혼 여행이구나. 정말 다시 혼자구나 실감이 나고. 잠시 공허하다가도, '이게 원래 나지!' 싶어 설레기도 하다.
앞서 궁상떨기 싫다고 했지만, 이 여행의 계기인만큼 떠오르는 그녀석을 접기란 어렵겠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3년간, 어찌 나를 그리 바보로 만들었는지. 원망 또한 접기 어렵고. 하지만 이런 감정들 또한 찰나의 것이 되었음을 느낀다. 하루 24시간을 차지하던 감정들이 이젠 커피 한 잔에 털어낼 수 있어졌으니 말이다.
'터널을 지날 때.' 이동진 평론가의 글처럼 모든 게 제자리를 찾고 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정직하고, 신은 나의 편'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믿는다. 그럼 진주언니 뉴욕여행기 가보자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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