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눈부셨던 작년 가을날, 남편과 두 아이와 올림픽 공원을 산책했다. 붉은색, 노란색으로 잎이 물든 나무들과 낙엽 이불을 덮고 있는 잔디밭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걸으니 불쑥 달리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오랜만에 올림픽 공원에 온 거라 들리고 싶은 곳이 많았다. 오도카니 서 있는 나 홀로 나무도 보고 싶었고, 숲에 둘러싸여 운치 있는 88호수도 눈에 담고 싶었고, 몽촌 토성 산책로에서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세계 평화의 문도 내려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첫째는 땅에 떨어진 밤송이를 구경하느라 5분째 한 자리에 머물렀다.
"엄마, 이거 뭐야?"
"이거 밤송이야. 시호 어린이집에서 밤 수확해서 집에 가져왔었지? 밤이 이 껍질 속에서 자라."
"와, 신기해. 이거 만져봐도 돼요?"
"가시가 뾰족해서 따끔따끔할 수 있으니까 조심해서 살짝 쓰다듬어 봐."
나와 첫째가 요리조리 밤송이를 탐구하는 동안 15개월 된 둘째는 유모차에 앉아있었고, 남편은 우리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바라봤다. '오늘도 공원 입구에서만 놀다가 집에 가겠네.' 시호가 집중하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예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길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달리는 것이 몸에 익숙해지고, 달리는 시간을 즐기게 되면서 주말에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가면 육아 중 잠깐 시간을 내서 '자유롭게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남양주 물의 정원에 갔을 때도, 양평 두물머리에 갔을 때도, 서울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을 때도 그랬다. 공원을 빠르게 한 바퀴 달리며 예쁜 풍경을 내 눈과 마음에 담고 싶었다. 매일 달리는 곳 말고 새로운 공간에서 달리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들 유모차 밀면서 남편과 대화 나누며 느긋하고 평화롭게 걷는 것만으로 행복했을 텐데, 달리기의 매력에 빠진 후론 '자연을 즐기는 나만의 방식' 하나가 생긴 것이다.
우리 부부의 주말은 첫째를 낳은 순간부터 24시간 육아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갔다. 이 녀석들이 주말에는 낮잠도 잘 안 자서 남편과 나는 쉬지도 못하고 육아에 파묻혀 살았다. 나들이 와서 달리고 싶어도 '함께 나들이 온 건데 계속 같이 있어야지.', '주말이니까 아이들이랑 오롯이 놀아줘야지.', '남편 혼자 애들 보려면 힘들 거야.' 라며 돌봄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달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지웠다.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고 남편에게 이야기도 해보지 않고 지레 포기했다. 하지만 그날은 용기 내서 말해보고 싶었다.
"자기야, 나 잠깐 달리고 와도 돼?"
그냥 툭 속마음을 꺼냈다.
"지금 달리고 온다고?" 남편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응, 20분 정도 달리고 올게. 대신 자기도 '자유 시간' 가지면 어때?"
"그럼 나도 좋지! 공원에선 애들 잘 노니까 나도 별로 안 힘들 것 같아." 걱정했는데 남편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와! 고마워. 그럼 지금 바로 달리고 올게."
"시호야, 우준아. 엄마 잠깐 달리고 올게."라고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엄마, 잘 달리고 와." 첫째가 웃으며 기분 좋게 손을 흔들어줬다. 엄마가 이틀에 한 번씩 밤바다 달리러 나가니 아이들에게도 엄마의 달리기는 일상이 된 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뒤로하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더할 나위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가족의 배려로 만들어진 시간은 나로 하여금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빠른 속도로 아름답고 다채로운 가을 풍경들을 즐기니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 솟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와서 수건으로 땀을 닦고 남편과 육아 바통 터치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달리면서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채웠기에 아이들에게 더 몰입해서 신나게 놀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20분 후 남편이 돌아왔다. 한결 편한 표정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자유 시간이 어땠는지 물었다.
"산책하면서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좋네. 잠깐이지만 혼자 쉬니까 힐링된다. 앞으로도 번갈아 자유시간 가져보자."
첫 경험 이후 주말 중 하루는 공원에 나들이를 가서 달리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 가족의 루틴은 이렇다.
1> 10분 정도 다 함께 놀며 장소에 적응한다.
2> 남편과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내가 30-40분 정도 달린다.
3> 내가 달린 시간만큼 남편이 자유 시간을 갖는다.
4> 넷이 함께 한 시간 정도 신나게 놀고, 밥을 먹으러 간다.
(*아이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호기심으로 충만해서 눈을 반짝이며 즐겁게 놀기 때문에 먼저 놀아주는 사람이 덜 힘들다. 그래서 남편이 먼저 아이들과 놀고, 다음은 내가, 그리고 넷이 함께 논다.)
혼자 달리고 오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할 것 같아 선뜻 제안하지 못했었는데, 솔직하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남편과 방법을 찾으니 육아와 달리기의 공존이 가능했다. 내 즐거움 외에도 장점이 많다. 먼저 공원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아이들과 나들이를 가면 매번 공원 앞쪽에서만 놀다가 집에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달리면서 놀기 좋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광나루 한강공원에서는 중간에 있는 놀이터를 찾았고, 미사 경정공원에서는 자전거 대여점과 핑크 뮬리 밭을, 용산가족공원에서는 언덕 넘어 있는 고즈넉한 잔디밭을 찾아서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또 남편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한다. 혼자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정자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두 아이들도 야외에서 놀다 보니 부모가 한 명이라도 보채거나 심심해하지 않고 둘이서 또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물론 나들이 중 달리는 것이 불편한 점도 있다. 달리고 나면 흐른 땀 때문에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원하는 만큼 오래 달리지도 못한다. 특히 10Km 이상 멀리 달리는 러너들은 감질이 날 수도 있다. 생각보다 놀러 간 장소가 아이들이 놀 거리가 없는 난감한 경우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비눗방울이나 풍선, 공, 킥보드 등 놀잇감을 챙겨간다. 배우자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럼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나들이 중 짧게라도 자유 시간을 가지면서 전보다 주말 나들이를 더 기다리고 즐기게 되었다.
내가 주말에 나들이 가서 남편과 번갈아 아이들과 놀아주며 각자 자유 시간을 갖는다고 하자, 5개월, 30개월 두 아기의 엄마인 친한 동생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언니, 그게 가능해? 우리는 주말엔 하루 종일 같이 아이들 봐."
"우리도 2년 넘게 그랬어. 근데 조금만 지혜를 발휘하고 에너지를 집중해서 쓰면 가능하더라고. 왜 항상 같이 아이들을 봐?"
"혼자 보면 너무 힘드니까. 남편이 요리는 잘하는데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건 어려워하거든."
"그렇지. 힘들긴 한데, 짧게라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아. 일단 10분씩만 자유시간 가져봐. 하다 보면 요령이 생겨."
"10분부터! 알겠어. 한 번 시도해 볼게. 나도 다시 요가 시작하고 싶어."
나들이 중 짬을 내서 달리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주말 자유 시간은 우리 가족의 문화가 되었다.자유 시간 자체도 2-3시간쯤으로 늘어났고 각자 즐기는 활동도 다양해지고 있다. 내가 할 일이 있는 날은 오전에 두 시간 카페를 다녀오고, 대신 남편은 오후에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온다. 가끔 내가 등산을 다녀오면 남편은 오후에 친한 친구들을 만나고 오기도 한다. 혹시 주말에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부부가 있다면 짧게라도 번갈아 아이들과 놀아주며 자유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가족 구성원이 각자 또 함께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이 온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