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또한 자본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은 돈을 지불해서 우수한 선수들을 사들이면 경기에서 이길 확률이 올라간다. 그래서 프로팀 안에서도 강팀과 약팀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막강한 강팀도 모든 경기를 이기지는 못한다. 어떤 한 경기를 놓고 누가 이길지를 예측할 때 기존에 쌓였던 통계들과 객관적인 전력을 토대로 승리의 확률을 따질 수는 있지만 그 경기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불확실성이 바로 스포츠의 존재 이유가 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돈을 불리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 안 되는 약자의 힘마저 가져가는 현실의 체계 속에서 그나마 공정함이 버티고 있는 분야가 스포츠다. 돈 많은 자도 힘 있는 자도 눈앞의 한 경기를 자기 뜻대로 이기게 만들 수는 없다. 돈이나 힘과 상관없이 그저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대와 희망에만 의지하면서 결과를 기다린다. 이런 공정한 대결의 무대가 이 세상엔 그리 많지가 않다.
나는 방송 중계보다는 직관을 선호한다. 방송으로 보면 편안한 자세로 정확한 설명을 바탕으로 경기 상황을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방송사의 카메라맨과 중계진이 편집하고 해석한 내용일 뿐이다. 경기장에는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중계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도 선수들은 치열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고, 선수를 바라보는 거대한 관중들은 각각의 무수한 감정들을 토해내고 있다. 이것은 그 현장에 있어야만 체험하는 광경들이고 스포츠의 그 광범위한 매력이 나를 경기장에 찾아가게 만든다.
쇼스타코비치의 전기 같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속에서 텔레비전으로 축구를 보는 것은 도수 센 보드카 대신 광천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는 문장을 읽으며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 경기의 직관에서는 무수한 우리 편을 만날 수 있고 때론 문학에서도 이렇게 같은 편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