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보일 때까지

by 수잔

내가 태어나기 전, 후로 그리고 살아가는 중에도 나 이외에 어떤 사람들이 글과 그림을

짓고 그에 관해 해석하고 발전하고 고여있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나도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기에 이미 그것은 하나도 새롭지가 않았다.

자아를 우주의 중심 위치로 배치했던 어린 시절보다 우주의 중심 바깥으로 밀어내

<'그들' 중 한 명>인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런 신비감에서 더 멀어졌다.


글은 종이나 바탕 위에 연필로, 타이핑으로 경험과 사유 같은 것들을 어휘, 문장, 어순을

병렬하는 방법으로 새겨지고 그림 역시 종이나 바탕 위에 수채화, 아크릴, 유화나 콜라주 등의 기법으로

경험과 사유, 상상력을 어딘가에 새긴다.

정해진 한계나 경계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그 경계 너머에 어떤 형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를 기다린다는 애틋한 마음도 덧대어졌다.


이 '새로움'이라는 미학은 나에게 문제의식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무언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생각한 즉시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깨달음의 미학'은

이런 소리를 냈다.

"너 그거 이제 알았어? 난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 말을 해서 산통을

깨트렸다.

(그럼 나는 누군가 알고 있거나 하고 있기 때문에 못해야 하나?

산에 새들도 비슷한 목소리로 노래하지 않나.)

나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어떤 오래된 욕구가 있다.

하나의 문장이 있다. 하나의 그림이 있다.

나는 그 그림의, 그 문장이 가진 본질적인 미학을 찾을 수 없다.

왜 좋은 지 모른다.

모나리자의 눈썹만으로, 미소만으로 모나리자에게 느끼는 직관적인 끌림을 전부 설명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수수께끼를 푼다면 이성에게 끌리는 수수께끼마저도 쉽게 풀릴 일이다.

그 좋음은 찾을 수 없는 미지의 것인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차원, 장소.

어느 미지의 공간, 좌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동경과 숭배로 인한 시각과 심상이

'새로움'의 시작이라면

나는 나 조차도 모르게 한 번 시도해보고 싶다.

나의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통적인 방식의 실기나 경험에서 불가능한 것을 내가

원하고 있다면 나 자신조차 내가 무엇에 도달하고자 하는지 목표를 새롭게 정해 보는 방식이다.

휘저어 섞고 휘저어 퍼트리고 뭉쳤다 흐트러지게 한다.

내가 모르는 규칙에 의해서 쓰고 그린다.

마지막 한 방울은 미지의 색깔이고 그 감각이 세계를 장식한다.


"난 수억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김 빠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외피에서부터 내피로 들어가 핵에 가까워지는 상상을 한다. 수천 년, 수만 년 전, 태곳적에 탄생한

처음 숫자의 뜻, 처음 글자의 뜻을 알고 싶어 한다.

어떤 상상을 질투하지 않고 아, 정말 좋구나.라고 슬퍼한다.

전부 실패해도 붙잡을 하나의 행동은

'바르게 보일 때까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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