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에는 중원의 사대부들이 다수 와 있었습니다. 다들 나그네라 번갈아 주객(主客)이 되어 엿새를 함께 지냈습니다. 밤낮 어울려 대화를 하다 보니 처음 만났으나 마음은 새롭고 일산을 기울이자 곧 옛 친구와 같아졌습니다. 임금이 머무는 곳이 수도인 법이니 당대의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겠지요.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여 수퍼컴퓨터를 만들 듯 브레인들이 총결집한 열하 학회의 면면들을 들여다 보시겠습니다.
먼저, 연암은 절친 홍대용의 지인들의 안부부터 확인합 니다. 그런데 그 지인들이 책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 80을 넘겼는데도 읽거나 쓰는 것에 지장이 없답니다. 벗함에 있어 나이를 개의치 않는 것이 연암 패거리의 공통점인 모양입니다. 일례로, 윤형산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안경이 없이도 가느다란 글씨를 쓰거나 자잘한 그림을 그려냅니다. 나이 70이 되었건만, 나이는 달력의 숫자였습니다.
조수선도 나이 60에 조선 사신단 업무 담당입니다. 예부에는 만인과 한인 두 상서를 두는데 조수선은 한인 상서입니다. 청나라는 커다란 출판 사업들을 진행하곤 했는데, 조수선이 역사 부문의 담당자였답니다. 그런데 그가 연암에게 조선의 과거제도에 관해 묻습니다. 연암은, 안경을 한 손으로 꺼내어 귀에 걸어 쓰는 동시에 한 손으로는 재빨리 글을 써서 필담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한손으로 운전대를 돌리며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 대화를 하는 현대인의 멀티 딱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노인들 뿐만이 아닙니다. 연암의 촉수에 걸린 사람은 25세의 미남 왕삼빈과, 12세 남아 호삼다도 있습니다. 연암은 일전에 9세 아이 사효수는 귀엽게 봤는데, 삼다에게는 짓궂게 놀리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 청소년은 귀엽는 좀 그렇죠. 하지만 연암은 호삼다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그려주는데, 조금은 고지식하면서도 공부하는 데는 진지한 범생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경순미(39세)와 파로회회도(47세)는 몽고사람입니다. 둘다 강관 교수입니다. 외국어대학교 몽고어 전공교수겠지요. 파로회회도(47세)는 건륭제의 외손자입니다. 청나라 황제는 외교 정책의 하나로 공주를 몽고인과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렇게 태어난 외손자에 교수 일을 줬네요. 경순미는 키가 크고 흰 얼굴에 눈썹이 짙은 차도남인 듯 합니다. 엿새동안 필담하는 자리에 끼어들지 않으니, 사람 좋아하는 연암도 '오만하다'고 합니다.
손자하고 ‘미국 열흘 여행’과 ‘유럽 열흘 여행’ 보드게임을 했어요. 손자는 아시아도 게임에 포함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유라시아 확장 팩이 나와야겠지요. 그렇게 글로벌하게 노는 우리가 정작 대한민국은 잘 모릅니다. '대한민국 열흘 여행' 보드게임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나를 찾으러 온 세계를 돌아다니는 격이 되었습니다.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계속 보는 한, 우리는 여전히 소중화(小中華)입니다. 아니, 이제는 소미화(小美華)일까요.
기풍액이 화신에게 아부하여 안찰사 자리를 꿰찼답니다. 청나라 최고의 탐관오리라는 바로 그 호부상서 화신에게요. 윤형산을 무시하고 교만을 떨더니, 저도 별 거 아니네. 그런데도 연암은 그 기풍액과도 그리고 그 윤형산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연암이 이별의 말을 하니 기풍액이 눈물을 다 흘리네요! 윤형산은 연암더러 주색을 경계하여 건강을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주(酒)는 모르겠지만 색(色)은 밝히지 않은 연암에게요. 주색은 경계하는데 성공했는지 몰라도 정작 윤형산은 다른 적에게는 발목을 잡힌답니다. 공명심이라는.
흰 머리카락의 늦깎이 고시생 왕민호와 말을 가릴 줄 모르는 광생 추사시와도 연암은 좋은 관계입니다. 이 두 사람이 조선 사신들에게, 태학관의 관광 가이드가 되어 줬답니다. 연암은 누구에게든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렸습니다. 다만 여자를 만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쉽군요. 황진이같은 팜므파탈 하나쯤 만났으면 세기의 로맨스 영화도 찍었을 텐데 말입니다. 해불양수-좋은 물이든 안 좋은 물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큰 바다 연암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