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이유 - 7

야경이 아름다우니까요

by 소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전화해봤어"

"왜그래? 무슨일 있었어?"

"그냥 바람이 적당해서, 바람이 좋아서, 바람이 좋지 않아서...

괜히 집에 들어가려니 마음이 꿀꿀한게"

"너 가을타나보다"

"그런가. 금방 쌀쌀해지려나봐 그치? 아까 지하철타고 한강대교 건너오는데 우리 비맞고 걸었던게 생각나더라. 그때 우리 왜그랬지? 갑자기 비가 왔나? 술이 취했었나?"

"어머, 기억이 안나? 네가 미친년처럼 걷고 싶다고 그랬어."

"진짜?"

"응. 미친년이 따로 없었지. 깔깔 웃어대면서 퍼붓는 비를 흠뻑 맞으면서 다 큰 여자애 둘이서 말이야. 길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지. 정말 가관이었을거야. "

"정말? 내가 그랬다고? 수빈이 너도 진짜 참 우정이다. 그걸 내가 하고싶다고 같이 했어?"

"그러엄, 그러니까 언니 말 잘 들어. 그때 신났었지. 한잔했겠다. 무서울게 있냐. 요즘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지만. 그때 너 감기몸살 독하게 했을걸"

"아, 요즘도 한번씩 비가 쏟아지면 흠뻑 맞고 싶을때가 있는데, 그때 덜 아파봐서 그런가."

"너 사주팔자에 물이 좀 부족한가보다. 어머니한테 한번 물어봐."

"...... 우리 제주도갈까?"

"뭐? 뜬금없이?"

"요즘 날씨 좋으니까. 금요일 퇴근하고 밤비행기타고 2박하고 돌아오는거지."

"또 시작이네. 이 역마살을 어째. 스케쥴 체크해보고 비행기 티켓 예매하자."

"오예, 수빈아 사랑해."


어느새 별이 총총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수빈이와의 통화는 늘 그렇듯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스무살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면 학교를 다니던 그때의 우리로 돌아간다. 세상 고민을 다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지만, 같이 이야기하고 기꺼이 함께해 주는 친구가 있어 뭐든 못할게 없었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이 별빛을 보며 길을 걷고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가감없이 속을 나누는 끝없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나면 어지럽던 마음이 별일이 아니게 된다. 혼자 뻗어나가는 욕심과 두려움은 어느 순간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수빈이가 없으면 어쩔 뻔했을까, 비행기표나 찾아봐야겠다.'


여행은 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내가 집요하게 떠나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매일이 무기력했다. 하루하루 출퇴근하는 길이 지겨워 죽은 듯이 살다가 날아가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저가 항공권 티켓팅에 성공한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서 만났다.

먼저 도착한 수빈이는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밤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야경 정말 멋지지 그치?"

"그러게 제주행 밤비행기는 처음 타보네. 역시 여행전문가다워"

도심을 환하게 밝힌 불빛들이 시야에서 점점 작아졌다. 불빛이 작아질수록, 일상에서 멀어지는 만큼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름 더위와 함께 인기가 한 풀 꺾였는지 가성비 좋은 숙소에서 마시는 꼬냑은 향기로웠다.

"한잔 마시고 숙면하고 내일은 월정리 해변으로 갈까? 비가 안와야 노을이 예쁠텐데. 인스타 인증샷 건져야하는데 말이야. 그치?"

"비와도 통창 카페 갬성샷도 괜찮지. 혜린이 너 정말 대문자P구나. 그래야 여행을 저리 다니는거겠지? 진짜 신기해. 그래 무작정 다녀보자. "

"이번에도 비오면 한번 시원하게 맞으며 걸어볼까? 하하"

그렇게 도착한 월정리 해변에는 낮 햇살이 아직 따뜻했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우리는 제주산 딱새우회와 갈치회에 어울리는 한라산 소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면 시간도 좀 느려지는 것 같지않아? 난 그럴때 있어. 마음이 약간 여유로워져서 그런거겠지?"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밤이야. 혜린이 너랑 있으니 정말 행복하네"

"오늘 밤을 기억하자. 수많은 밤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니. 그대눈에 치얼스"

취기가 올랐는지 수빈이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눈물 날 것 같은 아름다운 시간들.

문득, 나의 모든 역사를 함께한 수빈이는 내 맘을 편하게 할려고 어떤 애를 쓰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맞춰주다가 수빈이도 어느 순간 내 옆에서 떠나버리게 될까?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창가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다. 그 두려움마저 가볍게 스쳐가며 윤색할 수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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