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이유 - 6

감정이 짙어질때

by 소설

극장에 나온건 혜린과 민호 둘 뿐이었다.

"하여튼 어제 영화보자는 이야기 할때 준서 이 자식 낌새가 이상하더라.

자기시간을 좀 가지셔야 되겠단다. 수빈이는 왜 안나온대?"

"술이 덜 깨서 아직도 침대 안이래"

"그래 어제 수빈이 혼자 좀 달렸지. 들어가자, 상영관 6번이었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둘은 가볍게 발을 돌려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음, 다시봐도 아름답네. 역시 명작이야"

영화의 감흥에 한결 밝아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혜린은 기지개를 켰다.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좀 걸을까?"

건물밖으로 나오자 부드러운 바람이 혜린의 머리카락을 기분좋게 날렸다.

"이렇게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슬픔이나 배경에는 뚜렷한 사건이나 이유가 있잖아.

나는 그게 대체 뭘까 고민하는데, 무슨 이유로 한구석이 허전해지는건지 모르겠어. 이유를 모르니 해소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계단 층계를 내려가며 혜린이 던지는 말을 놓칠세라 간신히 보폭을 맞추며 민호는 귀를 기울였다.

"그건 내가 정하는거 아닌가"

"내가 이유를? 무슨말인지 모르겠어"

"내 인생인데 내가 정하는 거지. 나한테 임팩트가 있었던 사건 중에 하나를 정해서 그게 나에게 큰 영향을 주는 이유라고 생각해보면, 해결방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뭐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이유를 찾아서 트라이해보고, 해답이 하나일리가 없잖아. 자잘한 사건이 무수히 많고"

"단순해서 좋네"

"단순함이 궁극의 정교함이라는 말이 있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인가, 스티브잡스인가"

"늘 복잡한 문제들이 서로 얽혀있잖아. 간단하게 분리되는 문제들이 아니고"

"중요한걸 네가 결정해야 하는거지. '선택과 집중' 그게 진리더라, 나는"

"내 결정에 옆사람이 다치면? 엘리오처럼"

"안그러면 네가 상처입겠지"

"그러네."

시선은 앞을 향한채 나란히 걸으며 민호와 나누는 대화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금새 하늘이 연한 핑크빛으로 물들고 사위가 차츰 어두워졌다.

"이제 벌써 서늘해지나봐, 바람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따끈한 국물이 당기는데, 이자까야 어때? 따뜻하게 데운 사케와 페어링?"

"그래, 가볍게 몇잔만 마시자"


민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한강대교를 지나는 전철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한강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어두워진 하늘에 가로등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대화를 나누고 나면 뭔가 생각이 정리 되는 느낌이 좋았다.

취기였는지 좀 걷고 싶어서 한 정거장 미리 내려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어릴땐 좀 걸어서 다니기도 했던 보도블럭을 꾹꾹 눌러밟으며 친숙한 거리를 걸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서 더 걸었다. 호흡이 빨라지고 머릿속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시원했다.

가볍게 부는 바람이 이마에 있는 땀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단지 사이로 짙게 깔린 노을을 바라보자 이유없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익숙한 느낌의 답답함과 동시에 갈증이 밀려왔다.

저기 건물의 어느 층엔가 엄마는 무심한 표정으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요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엄마라는 사실이 아까도 어렴풋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마치 어둡고 칙칙한 동굴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면 번번이 실망하는 엄마의 표정이 떠올랐다. 낮은 한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엄마에게 확인을 받았다. 그러는 편이 훨씬 좋았다. 엄마의 반응을 살핀 후에 내 기분이 어떤지 더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응원하는 1호 팬이었으니까, 엄마의 이야기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엄마가 커다란 부담이라고 느끼기 시작한건 언니가 결혼을 하고 떠난 후, 언니가 차츰 발길을 끊은 이후부터였다. 엄마는 허공을 응시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의 일상을 더 궁금해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를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수빈아, 뭐해? 속은 좀 괜찮아?"

"응. 아직도 불편해. 이제 몸이 말을 안듣네. 너는 영화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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