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거는 주문
"술이라는게 마시면 용기가 생겨요.
싫은 걸 싫다고 말할수가 있고, 추우면 춥다고 그제서야 말할 수가 있어.
맘에 안드는 걸 버릴수 있는 용기가 생겨"
수빈이 저렇게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 한다는 건 얼큰하게 취했다는 증거다.
목소리도 얼핏 커진다.
"내가 너무 샤이한 아이였어, 목소리가 매번 기어들어간다고.
사람들이 쳐다보면 목소리가 안나와! 젠장.
또 우리 엄마는 수줍음 많은 나를 왜그리 싫어 하냐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있었던 일을 얘기해 달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멍석을 깔면 말이 안나와.
근데 말을 안한다고 내 발을 바늘로 콕콕 찌른다. 얼른 이야기하라고. 우리 엄마 진짜 왜그래?
자기가 부끄럼 많이 타는 성향이 나한테서 보이는게 싫었던 거겠지.
엄마가 왜그러냐고. 어른이면 더 이해하고 감싸줄줄 알아야지. 정작 자기가 그렇게 낳아놓고, 고작 초등학교 다니는 나를. 정말.
언어능력이 발달이 안되어서 제대로 어휘가 성립이 안될때잖아.
더 편안하게 만들어줘야 겨우 목소리가 나올까말까인데, 그 어린애한테"
흐느끼기까지하는 수빈이를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맨정신이었으면 서로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술을 마시면 판단이 흐려지잖아,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야. 분별하지 않는다는 거지.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명상의 사랑의 폭발이라는 상태.
사랑은 판단하지않아. 술 없이도 이 단계에 이르려면 우리가 훈련이 엄청 필요해.
왜이렇게 힘드냔 말이야. 알콜없이는 사랑이 이렇게 힘든거냐고.
그 사람 결점이 내눈에는 너무 많이 보인다고"
"어떨때 보면 수빈이 너는 꼭 우리 엄마같다니까."
혜린이 이야기한다.
"뭐야, 칭찬이야, 욕이야?"
"우리 엄마가 술이 취하면 막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하다가 철학자, 명상가, 예술가 이름을 줄줄 대면서 인생은 당연히 외로운 법이라고 갑분철학 이야기로 넘어가거든,
너랑 레파토리가 비슷해. 고상하면서 절절한 느낌.
매우 인간적이야. 술을 마시면, 평소에는 진짜 까칠하거든, 우리 엄마.
너도 그렇잖아. 되게 황당한데 그게 엉뚱한 매력인거.
아마 우리 엄마랑 MBTI 같을거야."
"그래서 둘이 친한가보네."
민호가 옆에서 끼어든다.
"엄마같아서 나 좋아하는거야?"
"응"
"자리 바꿔서 차 한잔 마시러 갈까? 수빈이 좋아하는 홍차 마시러가자"
"오, 오늘 코스 좋다."
오랜만에 진탕마실까도 생각했지만 대책없이 마셔봤자 어차피 모든 감당은 내일의 내가 떠맡게 된다는 걸 이제 안다.
"수빈이 좀 취한거 같지? 괜찮은가? 혜린이 너는 회사에서 술 안마셔?"
"응, 우린 점심회식"
"난 좀 아쉽긴하네, 근데 인제 많이 마시지도 못하겠다. 옛날이 좋았지... 우리 내일 영화보러갈까?"
"무슨 영화?"
"뭐, 아무거나 그냥 만나서 팝콘도 먹으면서... F1: the movie 어때?"
"난 봤어, 엄마가 보러 가자고 졸라서, 고든램지 닮은 사람이 나오는데 브래드 핏이라나 엄마가 젊을때 좋아하던 배우라고."
"역시 빠르군"
"우리 엄마가 친구가 없잖아. 혼자 좀 보러 가면 좋을텐데 싫은가봐. 근데 F1 재밌어. 4D관에서 보는거 추천해"
'여기서 어떻게 이어간다. 역시 철벽이네'
민호는 호흡을 가다듬고 힘주어서 다시 물어본다.
"그럼 너 보고 싶은거 없어?"
"뭐 딱히."
"찾아보자. 지금 용산 CGV 에 call me by your name 재상영하나 보네. 너 티모시 좋아하지 않냐?"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오른 엄지손가락으로 빠르게 화면을 스크롤하며 민호는 인상을 찌푸려본다.
"아, 진짜? 그거 볼까, 그럼?"
"좋아, 내일 늦잠자고 12시? 가능?"
다행이다. 영화는 대화를 힘들게 이어갈 필요가 없고 만나서 어색해하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좋다.
평소에는 거절이 두려워서, 상대방의 표정이 뜻하는 바를 머릿 속으로 계산하느라 생각이 복잡해져서 민호는 맨정신으로는 약속을 먼저 제안할 수가 없다. 수도없이 혼자 영화를 보러갔다.
영화가 끝나고 혼자 상영관을 빠져나올때 느껴지는 그 상대적 박탈감, 그 기분이 싫어서 밤 12시가 넘어서 보러가곤 했다.
역시 알콜은 뭔가 힘을 가지고 있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