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이유 - 9

헤어지려고요

by 소설

"친구 지인 동료분 촬영있습니다. 앞으로 나와주세요!"

사진작가의 목소리에 따라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젠틀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신랑 신부의 뒤편으로 나란히 선 그들의 모습은 화사했고, 프레임은 환하게 빛났다.

"수빈이가 왜 안보여?"

"그러게, 화장실 갔나"

"부케도 수빈이가 받기로 하지 않았어?"

혜린은 굳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응, 오늘 바쁘다고 하네. 부케는 아는 후배가 받기로 했어"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좋습니다. 신부님, 활짝 웃어요"

사진작가의 외침과 함께 어색한 웃음과 미묘한 시선들이 하나의 프레임에 담겼다.

찰칵.


그날 만남은 이상했다.

친한 여자동기 다섯명에게 연락해 청첩장을 건넸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수빈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떨떠름해 보이기도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혜린은 잠깐 어색함을 느꼈지만 금세 다른 친구들의 안부인사에 기분이 들떴다.

"역시 혜린이는 이렇게 멋지게 떠날줄 알았어. 결혼식하고 바로 출국이야?"

"응. 10일 정도 물건들 정리 좀 하고 나갈거야. 오늘도 짐 싸다 말고 나왔어."

"회사는 그만둔거야?"

"아니, 다음주에. 석달전부터 이야기했는데 사람이 안구해진다며, 끝까지 부려먹으려는 뻔한소리"

친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축하가 이어지나, 혜린의 기분은 둥실둥실 천장 위를 떠다녔다.

'결혼하면서 욕먹는 바보같은 여자들처럼 되지말자. 현명하게 굴어야지'

입꼬리에 힘을 주며 마음을 다잡았다.


"수빈아, 왜그렇게 못 먹어? 디저트 시킬까? 뉴욕치즈케익에 마리아쥬 프레르 웨딩 임페리얼? "

기분좋은 이야기로 저녁을 마친 후, 길목에 서서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결혼식날 보겠다. 그치"

수빈이 가방에서 꺼낸 연보라빛 봉투를 쥐어준다.

"혜린아, 이거 가는길에 읽어"

지하철 안, 사람들 사이에 서서 건네받은 봉투를 열였다.

귀여운 글씨로 차분하게 써내려간 편지.

간격이 일정하게 배열된 글자들 사이로 정성을 들여서 글자를 써내려가는 수빈이의 차분한 표정이 떠올랐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혜린아,


너에게 편지 쓰는게 참 오랜만이네.

요새 결혼 준비하느라고 몸도 마음도 바쁘지?

내가 따로 만나서 말하기는 어려울거 같아서, 그냥 편지가 낫겠다고 생각했어.

난 왜 이렇게 눈빛을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의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해야할 말은 당당히 하고 싶은데, 그게 늘 어렵더라.

아마 훈련이 더 필요한 것 같아.

그런 면에서 네가 항상 부러웠지.

자신감 있고, 군더더기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쿨한 성격.


스무 살의 우리는 늘 함께였지.

항상 밝은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너를 만나서 나는 참 좋았어.

온 종일 붙어다니며 학교 캠퍼스를 누비던 날들,

늘 웃고 또 엄청 울었던 기억.

술도 많이 마셨었다. 그때 고민이 많을 때였으니까. 연애고민이 주였겠지만 ㅋㅋ

난 요즘도 한번씩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며 웃음지을 때가 있어.

수많은 에피소드, 비하인드 스토리, 끝나지 않는 연결 고리들.

가을바람이 불면 더 자주 생각나. 늙은 걸까, 하하.

너와의 풍성한 추억이 내 기분을 따뜻하게 만들어. 너무 감사한 시간들이야.


학교를 떠나고 우리는 조금씩 바빠지고 지치고 각자의 고민이 달라졌겠지.

서로 마음이 흐려지기도 하고 연락도 드문드문 겨우 이어지다가 끊어지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차츰 공백이 길어지며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우리의 관계에 억지를 부리고 있는게 아닐까.

너는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원하는데 내가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우리 사이가 부자연스러워졌나.

너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은 매번 씁쓸했을까.

너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내 노력이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너의 결혼소식을 민호를 통해 듣는 순간 알수없는 고독감이 밀려왔어

'너에게 나란 얼마나 되는 존재일까'

그 기분을 너는 알까.

너와 헤어지고 돌아서면 너와 내 모습이 뭔지 모르게 비교가 되었었나봐.

거기에 못미치는 내가 나쁜 마음이 들었을까.

나는 언제까지 너를 빛내주는 조연으로 있게 될까.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날이 한번이라도 올까.

그게 겁나기도 했다.

너는 또 아무일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야기할테고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할지도 몰라.


너에게 나는 너의 주위에 둘러싸인 수많은 의자에 앉은 한 사람이겠지.

내 표현이 조금 과격하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라.

지금 깔루아 밀크를 한잔 마시며 편지를 쓰고 있거든.

감정이 요동친다.

내 마음을, 진실을 알았으면 좋겠으니까.

이런 내가 지질해보인다고 해도 어쩔수가 없다.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해야겠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너와 나의 관계가 만들어진 운동장이 조금 기울어졌다고 하더라도,

내가 너를 더 많이 애정한다고 해도,

다 감수할 수 있고 내가 공을 들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한켠에 그 서운함인지 억울함인지 미묘한 찌꺼지가 조금씩 쌓이더라.


더이상은 내가 초라해져서 안될것 같다.

너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지.

나는 늘 너를 궁금해했어.

너의 기분을 살피고 나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어.

너에게 종종 고민을 이야기하면

너의 중요한 이야기에 내 고민은 늘 묻히고 마는 기분이 들었어.

너는 매력적이고 인기 많았으니까

내가 새삼스레 더 그렇게 느꼈을수도 있고.

나의 온몸을 기울이는 노력이 다 무엇이었을까.

아마 근본적으론 내 열등감이 뿌리였을 수도.

이제는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그래서,

너의 결혼식에는 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결혼식 당일에 갑자기 통보하는 것보단 설명을 해주고 싶었어. 내 마음을.

이 편지를 쓰기까지 정말 오래 고민했다는 것만 알아줘.

어차피 너는 곧 미국으로 떠날거고,

이만하면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먼먼 거리에서 상당한 시간을 따로 보내고 나면,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확인해 볼 수 있을거야.


늘 예쁘고 당당한 너를 응원할게 .

잘 지내.

미국에서도 잘 지내고.


-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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