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이 기적이 되는 순간.
평생의 트라우마를 겪다.
익숙하지 않은 새롭고 쾌적한 아파트에 모처럼 마음이 들떠 있던 날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회사 동료 부인의 차가 아주 좋은 가격으로 나왔다며 그 차를 사겠다고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오는 주말, 남편은 그 차를 몰고 멕시코로 돌아왔다. 늘 그래 왔듯이, 남편은 일주일 내내 갇혀 살다시피 하는 나와 아이들을 새로운 차에 태우고 캐나다와 미국에서 멕시코로 이어진 1번 국도를 따라 바다로 연결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행복한 일상이었다.
지루하고 좀처럼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던 평일이 지나고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아쉬운 이틀간의 휴일이 번개처럼 지나가버렸다. 다시 일터로 향해야 하는 월요일 새벽 3시, 남편은 자신의 일터인 엘에이로 돌아가기 위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새벽부터 긴 행렬이 시작되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주말 내내 시달렸던 우리의 새로운 차는 아직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은 고요하고 어두운 세상 속에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남편이 차에 올라 시동을 켜는 순간,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차 안 이곳저곳을 만지다가 차의 실내등을 켜 놓은 상태로 차의 배터리가 방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1월의 새벽 겨울의 바닷바람이 민낯의 살갗에 닿아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쌀쌀한 날씨에 두터운 겨울옷을 움켜쥐고 아파트 담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나는 차를 고치려는 고심을 해 보았지만, 그 이른 새벽 알지 못하는 이웃들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감한 채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에 까만 트럭 한 대가 우리 곁을 지나치며 가고 있었다.
그 순간이 위험할 거라는 생각을 잊어버린 채, 차의 시동에만 신경 쓰던 남편은 그들에게 다가가 차를 세웠다. 남편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 방전되었는데 배터리 충전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들이 젊은 청년들이란 것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주말을 어디선가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양인 듯하였다.
그들은 지금은 차를 연결할 수 있는 도구가 없으니 집에 가서 가지고 와 도와주겠노라고 하고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날, 이상하리만치 나와 남편은 평안했고, 평상시 안전에 지나치리만치 신경을 쓰던 나 마저도 그날따라 아무 의심 없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일어날 일들은 결국 일어나고 마는 것일까?
"쟤들 혹시 강도 아닐까?"
"알 수가 있나?"
생각지도 않은 가벼운 농담이 남편과 나 사이에 오고 갔다.
"올까?"
"모르지 올지 안 올지...."
1월의 쌀쌀한 공기는 겨울 패딩을 걸쳐도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고, 남편이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나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파트 2층의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우리가 농담 삼아 뱉은 말들은 눈 깜짝할 사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악!!!!!!"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남편의 괴성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그 3초의 순간....
참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나의 온몸이 굳어졌다.
나의 머리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 할지,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할지 도무지 선택하기 힘든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갈등하는 머리와 달리, 이미 남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평생에 일어날 것 같지 않던 광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복면을 쓰고 나타난 두 청년...
지금은 강도로 돌변한 그들의 손에는 중간 길이 정도의 총이 들려있었다.
한 명이 남편의 머리에 총을 대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남편의 차를 뒤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강도에게 반항을 했다.
지갑만은 돌려달라고..
그 안에 모든 증명서가 들어있어 그것들이 없으면 남편은 일을 하러 미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강도는 닥치라고 남편의 따귀를 때렸다.
나는 빛의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남편의 입을 막으며 조용히 하라고 몸을 밀치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누군가에게 살면서 무릎을 꿇을 일은 없을 것 같았던 나의 인생에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이미 비굴하게 손마저 싹싹 빌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빌며 살짝 올려다본 복면 속 그의 눈...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는 눈이다.
노란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까만 복면을 쓴 그들은...
나를 쳐다보며 만약 자신들을 신고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집의 위치는 이미 노출이 됐기에 그 협박의 위력을 간과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머니에 있던 돈이란 돈은 다 쥐어 주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날이 밝아질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내가 쥐어준 돈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자신들이 오던 길로 잽싸게 뛰어 달아났다. 가로등 불빛은 뛰어가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우두커니 그들의 추악한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손에 넘어가 버린 지갑을 찾기 위해, 강도들의 뒤를 따라 뛰어가려던 남편을 온 힘을 다해 막아서며 아파트 계단으로 밀어 올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껏 지탱하던 나의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애쓰지 않아도 나의 빰엔 안도의 눈물이 아니라 공포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평화롭게 자고 있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좀 전에 무모한 당당함은 어딜 갔는지 남편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내가 울고 있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실감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윗동네에 살고 있는 한국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주변 한국 사람들이 나의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삼삼오오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나와 같이 스페인어 수업을 듣던 페루에서 사역을 하시던 목사 사모님이 도착하자마자, 기적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같은 남미권이라서 남미의 치안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지라, 총강도를 만나면 100% 그냥 죽이지 살려두지 않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나의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들에게도 충격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외국인이 죽으면 그야말로 개죽음이 되는 것이었다.
멕시코의 치안은 공권력에게 의존할 수 있을 만큼의 신뢰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남편은 경찰에게 신고를 하자고 했으나,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말렸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낯선 멕시칸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고 했다.
자기가 좀 전에 모든 일들을 다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총을 들고 있었기에 말리러 나올 수가 없었다며, 혹시 목격자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기가 증언을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경찰에 신고도 자기가 그 순간에 이미 했다고 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해도 그 남자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위험을 무릎 스고 그 사건의 증인이 되어 주겠다는 이 남성의 용기였다.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나를 보고 목사의 부인은 이미 신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강도들은 다시 이곳에 올지 모르니 위험하다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혼비백산한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깨워 세간살이고 뭐고 필요한 것들만 가방에 담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에서 떠나왔다.
힘들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하얀 새집... 나의 카사블랑카!
이 집처럼 온 세상이 하얗고 푸르게 나의 미래가 밝고 희망적일 것 같아 한껏 부풀어 있었던 지난 8개월!!!
그렇게 나의 하얀 희망은 검은 비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