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 통성명을 한 뒤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무슨 일 하세요?” 내지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정도가 아닐까 한다. 리서치 통계를 낼 때도, 신용카드를 만들 때도, 새로운 모임에 나가서도 기본적으로 묻는 것이 성별, 나이, 직업 순이다.
지금까지는 나 또한 학생, 방송작가, 회사원이란 평범한 타이틀로,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특별하게 꿀릴 것도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올해 초 20년 회사생활을 접고 백수가 됐다. 그러고 나서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지난 몇 개월간 두문불출하고 집에서 빈둥대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 세계적 생활수칙이 된 시대에 거리두기를 넘어 ‘사회적 고립’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던 중 어떤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20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는 아무개입니다... 너무 길다. 구차하다.
서울 사는 아무개입니다... 서울 사는 김 서방?
지천명을 앞둔 나이에, 그것도 싱글 여성이 백수라는 것은 청년백수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청년’이란 단어는 수많은 가능성과 희망을 내포한다. 그러나 ‘50세, 노처녀, 백수’ 이 세 단어의 조합은 ‘별 볼 일없는 인생’이란 느낌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심함과 측은함의 중간 어디쯤 되는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자식도 없고, 여태 뭐하고 살았을꼬? 쯧쯧...
이런 시선들에 소심한 마음이 들었다.
모임은 무르익고, 이런저런 두서없는 얘기들은 요즘 최대 관심사인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주제로 집중됐다. 그러다 세금 얘기로 이어졌고, 재산세 인상폭과 종부세 걱정으로 귀결됐다. 오가던 대화중에 내가 종부세 납부자란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바로 태도가 달라졌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사는 게 최고지 결혼을 왜 해요. 부럽네요...
쭉 혼자 편하게 살아요. 결혼하면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네...
결혼한 거 너무 후회돼요. 혼자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살걸. 자식들 때문에 이혼 못하고 사는 거죠...
대개 이런 반응들이다.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종부세 납부자다. 그리고 부양가족이 있는 싱글 여성 가장이다. 20여 년 전 아버지가 작고하신 후, 나는 가장의 이름을 단 세상의 모든 아버지, 어머니들을 진심으로 존경해왔다.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삶의 무게는 참으로 무겁다. 내려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막다른 길에서 비빌 언덕이 없는 흙수저에게는 더욱 고단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하고, 반드시 이루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으면, 쥐구멍에도 볕이 들고 쨍하고 해가 뜬다.
가장으로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나의 생존 재테크도 쭉 이어가야 하겠지만 20년 전처럼 막막하지는 않다. 지금은 밥벌이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고 20년간 수고한 심신을 쉬게 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