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간다, 그리고 늘 뭔가를 만난다

서부 오리건 로드트립- 대충 읽은 숫자가 데려간 곳

by Susie 방글이



우리 가족 여행에는 딱 하나의 원칙이 있다.


무조건 간다.


가고 싶은 데가 생기면, 그게 어디든 일단 출발부터 하고 본다. 목적지는 대충 정하고, 계획은 더 대충 세운다. 길은 감으로 잡고, 준비물은 대체로 빠뜨리고, 그리고 언제나 어김없이 뻘짓이 따라온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바다가 보인다는 해안 트레일을 찾았고, 초입에 세워진 표지판에서 '1 1/4마일'이라는 숫자를 본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11분의 4 마일쯤?’으로 읽었다.


"오, 진짜 짧네?"
누구 하나 의심도 하지 않고, 우린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다.

The Crescent Beach Trail in Ecola State Park, Oregon Coast- 에코라 주립공원에 있는 오리건 북부 해안의 크레센트 비치 트레일
늘 길을 헤매는 우리- 바다로 가는 길이?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딸이 걸음을 멈추더니, 슬쩍 표지판을 다시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깐만… 이거 혹시 1과 1/4마일 아니야?" (1.25 마일 - 2 킬로미터)


모두가 동시에 뒤돌아 그 표지판을 다시 들여다봤고, 곧이어 우리 입에서는 일제히 “아…"하는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숫자 하나도 제대로 못 읽은 우리 셋은 그 순간 완벽한 바보 삼총사가 되어 있었다.


뻔뻔하게 짧을 줄 알고 나섰던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렇게 반쯤 어이없는 표정으로 걷고 걷다가, 어느 순간 툭 트인 시야 너머로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숨이 멎을듯한 풍경이 갑자기 우리 앞에 펼쳐졌고,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순간에 잠시 멈춰 섰다.


그때 딸이 말했다.


"아 이건 영상으로 남겼어야 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편이 벌떡 외쳤다.


"그럼 다시 내려가서 처음 본 척 찍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우린 정말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바다를 처음 본 사람처럼, 감탄하는 표정을 연습하고, 카메라 세팅을 맞춘 뒤,


“하나, 둘, 셋,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고, 우리 셋은 감탄하는 연기를 했지만, 누가 봐도 '연출' 티 팍팍 났다.


하지만 감탄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고, 딸은 연기 도중 웃음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결국 그 영상은 웅장한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즉석 가족 코미디가 되었다.

끝없는 바다가 아닌 한 편의 그림이었다
속상하다! 사진으로는 아름다운 풍경이 안 담긴다.

그 일이 끝나자마자, 남편은 또 진지한 얼굴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야, 물개다! 진짜 물개 있어!"

"어디? 어디?! “


숨이 턱까지 차오른 순간, 남편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걸 믿냐. “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발을 멈추고 억울함이 폭발했다.


"뭐야, 진짜!!!"


남편은 배를 잡고 웃었고,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화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딸과 함께 멋지게 뛰어올라 사진을 찍어보려 했지만, 내 몸은 생각만큼 가볍지 않았다.


한 장은 내가 땅에 붙어 있고, 다른 한 장은 딸만 붕 떠 있었다. 운 좋게 둘 다 뜬 사진도 있었지만, 표정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가끔은 풍경보다, 그 속의 우리 표정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며칠 뒤, 아무런 계획도 정보도 없이 “그냥 바다나 한 번 더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들른 해변에서 우리는 그날 못 봤던, 진짜 물개를 만났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물개 떼였다. 바위 위에 널브러져 햇빛을 쬐고 있는 물개들은 우리가 감탄하든 말든 고개 한 번 돌려주지 않고 그저 시크하게 누워 있었다. 마치, "봐도 되고, 말아도 돼"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물개는 결국 보게 되네."


정보도 기대도 없이 갔던 그곳에서 우리는 진짜를 만났다. 그게 바로, 우리 가족의 여행이다.


’여기저기‘ 매거진은 정보성 여행 가이드가 아니다. 계획보다 우연이 많고, 목적지보다 이야기로 기억되는 우리 가족의 로드트립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무조건 간다.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오리건 주 해변의 풍경,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함께 감상해 보세요.


바닷가 수영장 예약 물개 손님들 전원 도착 완료
아직도 귓가에 물개들의 쩌렁쩌렁한 합창이 맴도는 듯하다.
바다 한가운데 모래사막이 펼쳐진 듯, 섬과 사막이 묘하게 공존하는 풍경. 여긴 바닷가일까, 사막일까?
소리까지 담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 그날의 빛과 바람은 사진에 남아 있어요.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오리건 주 해변의 풍경. 또 가고 싶네요.
숲의 틈새가 열리자, 눈앞엔 거대한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자리,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와 맞짱(?) 뜨는 인간의 유쾌한 도전이랄까요? ㅎ


이번 여행은 끝났지만 여운은 파도처럼 밀려왔고, 돌아오는 길에 짐보다 더 무거운 건 언제나 가득 채워진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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