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폰에 놀아나는 호구다
미국에 살다 보면 "쿠폰"이라는 단어가 거의 생존 도구처럼 따라붙는다. 신문 속 잔뜩 인쇄된 종이 쿠폰, 마트 계산대 옆에 쌓여 있는 전단 쿠폰, 앱 알림으로 날아오는 디지털 쿠폰까지. 미국인들의 주머니엔 늘 잘려낸 종이 조각이 있거나, 핸드폰 앱에 바코드가 줄줄이 저장돼 있다.
처음엔 '이걸 정말 다 쓰나?'싶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던 아줌마의 쇼핑 카트가 200 달러어치였는데, 쿠폰을 다 쓰고 나니 80달러만 내고 유유히 떠나는 걸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쇼핑이 아니라 전쟁이고, 그녀는 장군이다.
쿠폰은 단순한 할인권이 아니라, 생활의 전략이자 전쟁의 무기였다. 심지어 TV에는 "Extreme Couponing" (극한 쿠폰 쇼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장바구니를 꽉 채워와서 돈을 내기는커녕 거꾸로 잔돈을 받아가는 장면은, 한국 사람 눈에는 거의 마술처럼 보인다.
그리고 미국 마트 진열대에 붙은 안내문을 읽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 수학문제가 쌓인다.
• Buy 2, get 3rd 50% off (2개 사면 3번째 거는 50% 할인)
• Spend $30, get $10 off on your next purchase ($30 달러 쓰면 다음 쇼핑 때 $10 달러 할인- 이거 쓸려면 또 가야겠죠…?)
• Members only price (회원만 혜택 있음)
내가 장을 보러 온 건지, SAT 수학 시험을 치러 온 건지 순간 헷갈린다.
과자 세 봉지를 들고 계산대에 갔던 날이 있었다.
"Sorry, this coupon doesn’t apply. You need to buy 4." (죄송합니다만, 이 쿠폰은 4개를 사야만 적용됩니다).
직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봉지요? 근데 저는 세 봉지가 필요한데요…"
"네, 근데 할인은 네 봉지부터예요."
결국 나는 장바구니에 계획 보다 더 많은 과자를 담았다. 할인을 받으려다 살이 불어난 셈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나라에서 쇼핑은 내가 세일을 사는 게 아니라, 세일이 날 끌고 다니는구나."
반면 한국은 쿠폰보다는 '세일'이 훨씬 익숙하다. "오늘까지 50% 세일"이라는 현수막이 걸리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저절로 그 가게로 향한다. 쿠폰 따로 챙길 필요도 없다. 그냥 들어가서 물건 집으면 이미 할인돼 있다.
특히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건 1+1.
"이거 하나 사시면 하나 더 드려요."
계산은 필요 없다. 고민도 없다. 딱 떨어지는 직관의 세계다.
마트 진열대나 편의점 진열대에 '1+1' 빨간딱지만 붙으면, 당장 손이 간다. 원래는 샴푸 하나만 사러 갔는데, 어느새 집에선 1년 치 샴푸 재고가 쌓여 있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여기서도 성격 차이가 드러난다.
미국은 개인의 노력과 준비—즉 쿠폰 오려오기—를 중시한다. 그게 곧 '현명한 소비자'의 증표다. 반면 한국은 "너 굳이 머리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챙겨줄게"라는 식으로 집단적 편리함을 택한다.
여기엔 심리학이 숨어 있다.
미국인은 쿠폰을 챙길 때 ‘내가 이만큼 준비하고 노력했으니 얻어낸 성취’를 느낀다. 절약이 단순히 가격 문제가 아니라 자기 관리와 지혜의 증명인 셈이다. 그래서 쿠폰을 쓰는 순간, 사람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전략가가 된다. 그리고 '싸게 샀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한다.
반대로 한국인의 심리는 단순하다. "얻어걸린 이득"에서 오는 짜릿함. 계산대에서 "하나 값에 두 개요"라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행복 호르몬이 분출된다. 원래 계획에 없던 물건도 손이 가는 이유다.
이것은 가격이 아니라, "놓치면 손해 본다"는 불안 심리(FOMO-Fear Of Missing Out)와 맞닿아 있다.
즉, 미국은 '나는 똑똑하다'라는 자기 효능감을 보상받고, 한국은 '나는 놓치지 않았다'라는 감각적 쾌감을 보상받는다. 쿠폰과 세일은 단순한 장보기 방식이 아니라, 문화 속 깊이 스며든 심리의 반영인 셈이다.
나는 아직도 쿠폰과 세일 사이를 오가며 우왕좌왕한다. 미국 마트에서 계산할 때 쿠폰을 깜빡하면 괜히 큰일을 저지른 것 같고, 한국 마트에서 1+1 행사를 놓치면 내 지갑이 억울해 울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두 나라를 오가며 깨달았다. 미국에서는 쿠폰을 들고 다녀야 '제대로 산 사람'이 되고, 한국에서는 1+1을 집어와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방법은 달라도 진실은 하나다.
사람 마음은 언제나 똑같다. 싸게 사면 행복하고, 놓치면 억울하다.
그리고,
계산대는 언제나 작은 심리학의 실험실이다.
결국은 두고두고 마시자며....
쿠폰 덕분에 5달러를 아꼈지만, 많이 안 사도 될걸 샀다. 이게 미국식 절약의 함정이다.
생각해보면, 쿠폰으로 아낀 게 아니라, 쿠폰 때문에 쓴 거다. 이쯤 되면 절약이 아니라 소비 부스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