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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밑으로 프라이버시가 없는 나라

틈새철학에 대하여

by Susie 방글이





한국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 들렀다.

예전 기억 속의 휴게소 화장실은 늘 붐비고, 좀 낡고,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요즘 화장실은 달랐다.


바닥은 반짝였고, 상상했던 냄새보다는 은은한 플로랄 향기가 퍼졌으며, 자동으로 물이 내려가는 변기와 최신식 세면대까지 갖춰져 있었다.

쾌적하고 깨끗해서 '공용 화장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와, 이제는 휴게소 화장실이 이렇게까지 발전했구나!"

그 놀라움이 오래 남았다.


한국 화장실 칸에 들어가면, 문이 닫히는 순간 하나의 작은 방이 생긴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빈틈없는 구조.

볼일을 보는 동안만큼은 세상과 단절된 안식처다. 심지어 잠시 거울을 보거나, 문자 답장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정리할 여유까지 허락된다.


그런데 미국 화장실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문을 ‘철컥’ 닫았는데, 옆 틈으로 저쪽 세상의 다리와 눈빛이 스친다.

밑으로는 신발이 또렷하게 보인다.


"저기 있어요!"라는 현수막이라도 달아놓은 듯, 내 존재가 은근히 노출된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갑자기 옆으로 그림자가 지나가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심지어 누군가 호기심에 살짝 고개를 돌려 '틈새 확인'을 하는 순간, 비밀스러운 공간은 곧장 무대가 된다.


처음엔 이 구조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프라이버시는 지켜주고 싶다… 근데 발목부터는 다 공개네
문은 닫혔는데, 시선은 열려 있다

첫째, 안전 때문이다.

미국은 범죄율과 마약 문제 때문에, 화장실이 은밀한 장소가 되는 걸 꺼린다.

문틈은 안전 점검용 창구다. 누군가 수상한 행동을 하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바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식 '완벽 차단 구조'였다면, 작은 범죄 아지트가 되기 딱 좋았을 것이다.


둘째, 구조와 응급 상황 대처.

안에서 사람이 기절하거나 쓰러지면, 한국 화장실은 문을 부수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렵다.

하지만 미국 화장실은 발만 보여도 상태를 알 수 있다. 문틈은 일종의 생존 알림 창이다.


셋째, 청소와 환기.

밑이 뚫려 있어야 청소 도구와 물이 쉽게 오가고, 환기 효과도 있다.

한국은 바닥 전체가 방수 구조라 물청소가 자연스럽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틈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비용 절감

위아래 최대한 막혀있는 칸막이는 설치비가 두 배, 유지보수도 번거롭다.

미국은 비용과 효율을 중시하니, '가릴 만큼만 가리자'라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이쯤 되면 문틈도 미국식 실용주의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실용과 편안함 사이의 간극이다.


나는 미국 화장실에서 자주 원치 않는 관찰자가 된다.

옆으로는 다리 그림자가 오가고, 밑으로는 신발 패션이 끊임없이 스쳐간다.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이 내 신발을 힐끔 보다가, 나와 눈빛이 딱! 맞는 경우도 있다.

"여기 있습니다. 확실히 사용 중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문틈은 늘 나 대신 방송 중이다.


더 난감한 순간도 있다. 회사 화장실에서다.

동료들이 무슨 신발을 신고, 어떤 바지를 입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칸 밑으로 신발이 보이는 순간 정체가 드러난다.

"아, 오늘 빨간 구두면, 메리네. 옆 칸 청바지는 리사겠구나."

누군가의 사적인 시간은 순식간에 동료들과의 본의 아닌 '공동 이벤트'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더 난감하다. 속이 안 좋아 오래 버티고 있으면, 신발로 정체가 드러난 순간부터는 그 사실이 사내 전파망으로 퍼진다.


"저 신발 아직도 안 나왔네… 오늘 누군가 고생 중이구나."

이렇게 원치 않는 공감(?)과 함께, 들킨 듯한 민망함이 덤으로 따라온다.

결국 신발 하나가 나의 장내 사정을 은근히 실시간 중계해 버리는 셈이다.


반대로 한국 화장실에서는 ‘나만의 공간’을 만끽한다.

문 닫는 순간 세상이 차단되고, 오로지 나와 내 생각만 남는다.

공간 철학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틈새도, 밑창도 없다—이게 진짜 프라이버 시지
이 정도면 화장실이 아니라 개인 스위트룸.

한국은 벽을 세워 개인의 고요와 사생활을 보장하고, 미국은 틈을 남겨 효율과 안전을 지킨다.

한쪽은 "아무도 모르게”의 철학이고, 다른 쪽은 "누군가 알아야"의 철학이다.

공간을 막느냐, 열어두느냐의 차이가 곧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니 오늘도 미국 화장실에서 신발로 동료를 알아보며,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유머와 철학이 만나는 곳, 그게 바로… 문틈이다.


두 나라 화장실의 차이는 생각보다 입체적이고,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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