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던 노래가 안 들릴 때

허무와 흔적

by Susie 방글이




바다와 한 몸이 된 시간


폭설과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를 피해, 딸은 친구와 따뜻한 하와이를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일주일 동안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서핑보드를 타고 물 위에 엎드려 파도를 기다리고, 스노클링을 하며 물속에서 숨을 고르고, 눈을 뜨면 바다이고 몸을 움직이면 물이 반응하는 시간들.


그곳에서는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존재가 된다. 딸은 그 시간을 두고 "아무 생각 안 해도 되는 상태였어"라고 말했다.


몸을 움직이면 물이 반응하고, 가만히 있으면 파도도 함께 멈춰서는 듯했다.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도, 다음 일정에 쫓길 필요도 없었다. 파도가 오면 타고, 지나가면 기다리는 일만으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배경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좋았다기보다는, 그 순간의 자신과 묘하게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밤바다와 불타는 화산


낮에는 바다 거북이가 물 위로 올라와 쉬는 모습을 보고, 현지인에게 서핑도 배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 스노클링을 하며 물고기들과 산호, 작은 해양 생명체들을 관찰했지만, 밤에 하는 스노클링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물속이 깜깜해지자 반짝이는 해양 생물들과 파도 소리가 온몸을 감싸며, 낮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이 되었다.


때마침 화산 폭발 직전인 장소로 향해 차를 달리며, 제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화산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폭발 직전이라 너무 위험해 출입을 막아놓은 상태였다.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서러움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멀리서 터질 듯한 용암의 불빛을 바라보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동시에 얼어붙는 묘한 긴장과 흥분을 느꼈다.


아무 일도 안 해도 괜찮은 시간이라는 걸, 바다 거북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낮이랑은 전혀 다른 얼굴이라 괜히 오래 숨 참고 보게 되던 밤 스노클링.


파도 소리랑 숨소리만 또렷했던 밤의 바다.


Kilauea Volcano, Hawaii - 터진 화산은 말이 없고, 연기만 천천히 올라온다.


화려한 색의 도마뱀? 은 이 섬에서 딸이 관광객이라는 걸 제일 먼저 알아보는 존재 같다.


현실로 돌아온 음악과 현타


여행에서 돌아온 첫 출근길, 차 안에서 하와이에서 들었던 노래를 틀었다. 딸은 하와이에서 그렇게 좋던 노래가 '좋지가 않았어'라고 말했다. 노래가 변한 건 아니었다. 다만 파도도, 소금기 어린 바람도 없는 자리에서, 다시 운전석에 앉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차는 신호에 맞춰 멈추고, 시선은 시계와 일정표를 오가고,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흘러가는 소리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각이 반듯한 책상 앞에 앉았을 때, 현타는 아주 정확한 순서로 찾아왔다.


바다에서는 방향만 있으면 됐는데, 여기서는 역할과 직함과 해야 할 말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 자연 속에서는 잠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몸이, 이곳에서는 다시 효율과 결과로 정렬된다. 서핑보드 위에서 파도를 기다리던 시간은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었지만, 책상 앞에 앉는 순간부터는 이유와 근거, 그리고 다음 단계가 요구된다.



허무는 흔적이자 배움


그래서 여행 뒤의 허무는 휴식이 끝나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넓은 감각을 쓰다 돌아온 사람이 갑자기 제한된 공간 속에 앉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출근길에 들은 음악이 좋지 않았다는 딸의 말도 음악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자연과 한 몸이 되었던 감각이 다시 자본주의 구조 안으로 접히는 순간의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몸은 의자에 앉아 있지만, 감각은 아직 바다에 남아 있는 상태. 그래서 그 노래는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잠시 다른 존재로 살았다는 증거처럼 들린다.


나는 딸에게, 딸 같은 친구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 그 허무를 빨리 지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철들지 못해서 생긴 감정도, 다시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도 아니라고. 그건 어딘가에서 분명하게 숨 쉬고 돌아왔다는 흔적이고, 몸이 아직 그 기억을 놓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회사 책상에 앉아 있어도, 우리 안에는 아직 파도의 리듬이 남아 있다. 그걸 잊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우리는 이미 한 번 배웠다.


다시 바다로


하와이, 이제 엄마 아빠랑, 우리 셋이 같이 가자.

우리가 가장 완벽할 때는 바로 우리 셋 일 때니까.

아마 그 노래는 다시 하와이에 가야 좋을 거야.

우리 같이 가서 듣자.

책상에 앉아 말고, 파도 옆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하와이 바다, 비행기에서 보는 또 다른 아름다움에 잠시 숨을 고른다.


그 노래가 다시 좋아질 때까지, 우리는 잠시 파도 쪽에 마음을 두고 살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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