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황도 번역되나요

한국어를 알면 웃는 장면, 모르면 그냥 지나간다

by Susie 방글이




몇 년 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한국 드라마에는 번역이 따라오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사건이 커서가 아니라, 말이 너무 작아서 생기는 순간들이다.


썸을 타는 남녀가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서 있고, 그들 앞에는 서로를 꼭 안고 있는 커플이 있다.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자 주인공이 툭 던지듯 한마디 한다.


"나도 앉고 싶다."


한국어에서 이 문장은 유난히 말랑하다. 앉고 싶다는 말이 꼭 의자를 뜻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꼭 품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상황에 따라,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문장이다.


한국어는 가끔 말을 하기보다 눈치를 먼저 떠넘기는 언어이니까. 남자 주인공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는 이미 의자보다 몇 걸음 앞서 가 있다.


"어... 지, 지금? 여기서? 안될 것... 같..?"


상상은 질주했고, 현실은 아직 정류장이다. 그 순간, 꽉 차 있던 벤치에서 누군가 일어나 자리가 하나 생긴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며 웃는다.


"걸어왔더니 다리가 너무 아파요."


그제야 남자는 깨닫는다. 아, 이건 로맨스가 아니라 다리 문제였구나. 시청자들이 웃는 이유는 오해 자체보다, 그 오해가 너무 한국어답게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궁금해졌다. 이 장면에서 "나도 고 싶다"는 영어 자막으로 어떻게 번역됐을까?


"I want to do that too."(나도 저거하고 싶다)


순간, 감이 확 달라진다. 영어 문장은 너무 성실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분명하고, 여지가 없다. 의자도 아니고, 품도 아니고, 그냥 that이다. 영어는 친절하지만, 이 장면에서는 너무 친절해서 웃음을 지워버린다.


한국어의 재미는 뜻보다 의미가 미끄러질 수 있는 공간에 있다. 그 여백을 채우는 건 늘 상황이고 눈치고, 혼자 앞서간 마음이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의 로맨스는 종종 사랑 고백보다 말 한마디의 오해에서 더 반짝인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른 드라마 장면도 떠올랐다. 넷플릭스 시리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Can This Love Be Translated?)의 한 장면이다. 극 중 한 캐릭터가 말한다.


"세상에 다른 언어가 몇 개인 줄 아나? 세상 모든 사람의 수만큼 있지.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 말을 해. 그니까 서로 못 알아먹고 거꾸로 듣고 막말을 하지."


즉, "언어"란 공식적인 수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수만큼 존재하며, 각자가 전부 다르게 말하고 이해한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카메라는 말의 여백을 잡아낼 수 없다.


이 장면을 보면, 언어와 번역의 차이가 더 실감 난다. 우리는 해외 드라마를 보며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있을까. 그 나라 말을 알았다면 웃었을 농담, 자막으로는 전달되지 않은 뉘앙스, 번역 과정에서 얌전해진 감정들.


그런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번에는 반대로 살짝 안돼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며 이런 장면들을 얼마나 많이 그냥 지나치고 있을까. 한국어를 몰라서 저렇게 귀한 오해를 못 보고 지나가다니.


한국 드라마의 묘미는 종종 이야기보다 말의 여백에 있는데, 그걸 놓친다면 마치 김치찌개에서 김치를 건져내고 "국물은 괜찮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맛은 있는데, 왜 다들 열광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상태 말이다.


언어는 번역되지만 눈치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웃음은 국경을 넘는 순간 사라지고, 어떤 장면은 그 언어를 아는 사람에게만 끝까지 도착한다.


그래도 괜찮다.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방금 뭔가 재미있는 일이 지나갔다"는 감각만은 남으니까. 다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은, 한국어로 알았으면 진짜 웃겼을 텐데.


덧붙이자면, 언어학에서는 이런 차이를 '의미의 여백(pragmatic ambiguity)'이라고 부른다. 문장의 뜻은 하나지만 상황과 관계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상태다. 로맨틱 코미디는 이 여백을 가장 맛있게 써먹는 장르 중 하나다.


그래서 오늘도 드라마를 본다. 어쩌면 이 웃음이 번역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조금은 우쭐해진다. 이렇게 사소한 오해 하나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게, 한국어를 안다는 소소한 특권처럼 느껴지니까.


사전과 영화책, 언어와 장면. 그러나 카메라는 의미의 여백을 담지 못한다.


언어는 사람 수만큼 존재하고, 그 여백을 아는 사람만 즐긴다.



PS. 우연찮게, ‘이 사랑 통역 되나요?’와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의 여배우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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