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 있을 거라 믿었던 미국에서

"내일 나가자”가 통하지 않는 날

by Susie 방글이




"내일 나가자"는 그날, 너무 쉽게 말해버린 약속이었다.

그날 우리는 '내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딸이 집에 있는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셋이 함께 있는 시간이라 특별한 계획 없이 느긋하게 보내기로 했다. 사야 할 것들은 꽤 있었지만, 토요일은 그냥 빈둥거리기로 했다. 괜히 나가기엔 귀찮음이 더 컸고, 그 귀차니즘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일 가자"로 이어졌다. 급한 것도 없었고, 늘 그랬듯 내일은 아무 일 없이 이어질 거라 믿었다.


우리는 그날,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꺼내 썼다.


문제는 그 '내일'이 Easter Sunday (부활절) 였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섰다. 평소처럼 차를 타고, 평소처럼 쇼핑몰에 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주차장이 비어 있었다. 넓어서가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 앞으로 가서 손잡이를 당겨봤다. 안 열렸다. 괜히 한 번 더 당겨봤다. 역시 닫혀 있었다.


그날 우리는 몇 군데를 더 돌아다녔다. 혹시 여긴 열었나 싶어서, 혹시 저기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몇 번을 헛걸음을 하다 보니, 괜히 우리만 모르는 비밀 휴일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결과는 같았다.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쇼핑몰뿐만 아니라, 마트도, 카페도, 식당도, 동네 가게들도.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만 모르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집에 있는 느낌. 나라가 나만 빼고 단체로 쉬는 날을 정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날은 원래 문을 닫는 날이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 도시 전체가 잠시 속도를 늦춘다고 했다. 예전부터 이어져 온 익숙한 리듬이었지만, 우리는 그날 굳이 나갈 일이 없어 알지 못했을 뿐이다. 늘 열려 있는 나라라고 믿었던 건, 사실 우리가 열려 있는 날에만 움직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국에서는 부활절이 가게 문을 닫는 날도 아니었고, 주말이나 일요일은 오히려 유통업계가 가장 바쁜 날이라 대부분 정상 영업을 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날이 '아무것도 못 하는 날'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날은 가게도 쉬는 날이었다


미국 대형 유통업체 Target도 쉬는 날이라면, 그날은 진짜 쉬는 날이다


동네 와인 가게도 이날은 문을 닫는다. 이번 부활절엔, 미리 사둬야겠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셋이 웃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못 할 수가 있나 싶어서. 그날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날이구나"를 배운 날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조금 다른 습관이 생겼다. 부활절 전날이 되면 괜히 냉장고를 한 번 더 열어본다. 분명히 있는데도 다시 확인하고, 계란도 남아 있는데 또 사고, 혹시 몰라 간식까지 챙긴다.


마치 하루 문 닫는다고 며칠은 버틸 사람처럼.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안 사면서도, 그날만 되면 괜히 더 준비하게 된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내일'을 조금 덜 믿고, '하루 전날'을 조금 더 열심히 살게 되었다.


며칠 뒤면 Easter Sunday다. 이맘때가 되면, 몇 년 전 그날이 문득 생각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장면들도 이어진다. 나는 종종 차 안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마트 주차장에서, 집 앞 드라이브웨이에서, 혹은 아무 목적 없어 보이는 길가에서.


시동은 꺼져 있고, 핸들을 잡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 휴대폰을 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그냥 잠깐 멈춰 있는 사람들.


예전에는 그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을까, 왜 바로 다음으로 가지 않을까. 한국이었다면 이미 시동을 끄기도 전에 집에 들어갔을 시간이다. 주차를 하고도 차에서 바로 내리지 않고 앉아 있으면, 누가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차는 늘 이동을 위한 공간이었고, 멈춰 있는 시간은 왠지 아깝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어쩌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중이 아니라, 잠깐 멈춰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가기 전의 시간,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의 짧은 여백. 굳이 서둘러 이어 붙이지 않아도 되는 순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짧은 멈춤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차 안은 그렇게 잠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의 작은 전환 공간이 된다.


문을 닫아두는 하루와, 차 안에 머무는 사람들. 어느 순간 둘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세상이 멈춘 게 아니라 원래 비워둔 시간이고, 어떤 순간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여백이다.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은 시간. 노을이 다 지고 나서야 움직일 것 같은 시간.


여전히 부활절 전날이 되면 괜히 장을 더 본다. 그건 아마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와도, 그게 꼭 불편한 일만은 아니라는 걸. 어쩌면 그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가끔은, 일부러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어디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않은 채, 그 사이에 머무는 시간이 좋을 때가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일'을 조금 덜 믿게 되었다.

대신, 그 사이의 시간들을 조금 더 믿게 되었다.


왜일까. 다 같이 닫는 분위기 속에서, Trader Joe's만은 예외다. 의외지만, 덕분에 숨통이 트인다



요즘은, 아무 일 없는 하루의 틈을 조금 더 믿는다. 그리고 혹시 이번 부활절에 필요한 게 있다면, 트레이더 조 는 열려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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