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를 읽었다옹
평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직장에서 일을 할 때, 혹은 글을 쓸 때 같은 낱말을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때때로는 내가 표현하고싶은 용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고,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단어를 뱉어낼 때도 있다. '어휘력'을 키워야 한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지만, 누구나 자동적으로 '어른의 어휘력'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면에서 <어른의 어휘력>은 이런 고민이 드는 시점에 읽으면 좋을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어휘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자 대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 힘과 시각을 기르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p.7)
머나먼 과거에, 우리의 조상들은 책을 읽으며 삶을 영위해나가지 않았다. 원시 인류는 "사냥, 수렵, 채집" 등으로 먹거리를 구했고,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고 관찰하고 경계"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오랜 기간 생존해왔던 인류는 불과 6,000년 전부터 문자로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때로부터 현재까지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뇌의 작동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6,000년은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기나긴 세월이지만 인류의 진화 측면에서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자나 글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태생적으로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고 독서에 적합하게 진화하지 않았다. 책을 읽어 지혜로운 자가 된 게 아니라서 그 후손들은 그냥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지 않는다.
(p.20)
책장이 물 흐르듯이 술술 넘어가는 책들이 있는 반면, 몇 줄만 읽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한 느낌의 어려운 책, 이해하기 힘든 책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포기하곤 하지만,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음으로써 그것을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건 책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시킬 수 있는 원리이다. 어린 시절 이해하기 어려웠던 영화가 떠올라 다시 봤을 때 그 속에 담긴 숨은 의미들을 찾을 수 있고, 한 때는 듣기 싫었던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잔소리가 언젠가 이해되는 순간이 오곤 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책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과거 자신의 어휘력 결핍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경험의 부재였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어 봄으로써 새로운 개념을 습득할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나중에라도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씨앗'을 심어둔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신 밭에 뿌려둔 감(感)이라는 씨앗은 여하튼 어떻게든 자란다. 그러다 문득 내게 당도해버린 시간을 통과할 적에 떠오른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니고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서툴게 더듬어 찾아가면 오래 전 내 정신 밭에 뿌려둔 씨앗 자리에 뼈가 자라고 살이 붙어 서 있는 형상과 마주한다.(p.26)
많은 개수의 낱말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는 낱말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p.34)
정확한 어휘를 구사해야 하는 이유는 해석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다.(p.35)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경험을 상대방에게 설명할 때에는 대화를 하는 대상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것을 망각하고 상대방의 반응에 답답함을 느끼곤한다. 그러나 내가 표현하는 언어의 한계는 상대방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분한 설명도 필요하지만, 어휘력을 키우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듣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언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상대방의 얘기를 천천히 듣다보면 한층 더 여유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만 겪은 일을 당신에게 알리고, 당신이 겪은 일을 내가 알 길은 언어밖에 없다. 언어는 강철보다 견고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두드려 금 가게 하고, 틈이 생기게 하고, 마침내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p.41)
대상이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빈약한 환경은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언어로 발화된다.(p.46)
다음은 '말'에 대한 관용구다.(p.50)
말(을) 내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을 이야기하여 소문을 내다
말(을) 듣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다.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당하다. 기계 따위가 마음대로 잘 다루어지다.
말(을) 못 하다; 말로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말(이) 굳다; 말할 때 더듬거려 말이 부드럽지 못하다.
말(이) 나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이 알려지게 되다. 말이 이야깃거리로 나오게 되다.
말(이) 되다; 하는 말이 이치에 맞다.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의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다.
말(이) 떨어지다; 명령이나 승낙 따위의 말이 나오다.
말(이) 뜨다; 말이 술술 나오지 않고 자꾸 막히거나 굼뜨다.
말(이) 많다; 말수가 많다. 수다스럽다. 말썽이 끊이지 아니하다.
말(이) 아니다;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지가 매우 딱하다.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비단 표현을 '정확히' 하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넓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상을 더욱 '관심'있게 바라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반도에 있는 삼면의 바다 색깔을 모두 'Blue'라고 표현했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표현 방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작가처럼, 우리는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자신이 관찰한 대상을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1989년에 중국 천안문에서 발생한 '중국 정부의 시민 무력 진압 사건'을 두고 누군가는 '천안문 사태'라고 표현하고, 누군가는 '천안문 사건'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어휘란 곧 시대를 담고 인식을 담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빌려온 남의 눈이 아니라 내 눈으로 대상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신비와 환희에 가득 찬 기쁨을 보며 오롯이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p.59)
어휘력은 문장을 낱말로, 서술을 명사나 형용사로 줄이는 기술이기도 하다. 세상의 사물과 현상은 저마다 명칭을 가졌고 이 장에 소개한 것처럼 소소해 보이는 것들마저 가지고 있다.(p.75)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을 안다고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사물과 현상은 맞춤한 이름을 알면 거의 아는 것이다. 단순히 이름만 아는게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아는 것이다.(p.75)
최근 유튜브를 통해 '우울'과 관련된 영상이 본 적이 있다. 크리에이터는 김태형 작가의 <무의식의 두 얼굴>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사람들이 이유없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자신이 왜 우울한지 몰라서'라고 설명했다. 아리송한 얘기지만 이를 풀어서 얘기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의 영향에 의해 분노와 우울의 감정을 겪을 수 있지만, 곧바로 표현하지 않고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감정이 무의식 속에 쌓이게 되고, 시간이 흘러 그 원인은 잊혀지고 우울한 감정만 무의식 속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잘 돌아보고,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발견함으로써 건강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단계도 있을 것인데, 저자는 이번 글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눈물이나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알맞은 어휘를 활용한 표현은 '눈물'이나 '꿀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라 대응할 수 있는 이성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울고 싶지만 울지 않고, 꿀밤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품위 있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표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퀴지을 지성을 갖췄다는 것이다.(p.81)
자신이 몸과 정신으로 체험한 낱말을 사용해야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고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p.87)
사람은 자기 세계 밖에 있는 상대의 언어를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We cannot think what we cannot think).'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2017년 기준 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맹률은 1%밖에 되지 않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 실질문맹률은 무려 75%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 해당하는 사람들은 글을 읽더라도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해력이 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장에 쓰인 에피소드 속에 등장하는 라디오 DJ는 작가가 쓴 대본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단순히 문법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의인화'라는 개념에 대해 알고 그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채야 이해할 수 있는 대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직관'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 많은 일상과 생활을 체험하고, 많은 이들과 대화하며 그에 따른 사고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언어적 직관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적 상상력, 은유, 함축, 의인화 운운해봐야 난해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언어적 직관이 통한다는 말이다.(p.99)
국가든 기업이든 사람을 '인적자원'이 아니라 '인재'로 여겨야 하고 개발도 좋지만 계발에 힘써주길 바란다.(p.102)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이 뿌리 깊은 갈등이 된 것은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차이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차별한 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p.113)
우리말은 형용사와 동사가 잘 발달해 구태여 피동형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p.120)
영어 문법은 잘 모르지만 기본적인 단어 몇 가지만 알아도 외국인과 대면했을 때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대화를 하는 상황과 바디랭귀지, 그리고 대화하는 이들의 직관 등이 결합하여 의사소통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어렵다. 더 깊은 주제의 대화를 위해서는 바른 문법과 어휘력 등의 언어구사력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우리말을 사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말의 문법과 맞춤법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말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는 우리말의 특징에 대해 자세히 알기 어렵고, 잘못되거나 어색한 말과 글을 사용하게 되어 업무상 문제가 생기거나 함께하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독서는 독서대로, 우리말은 우리말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다면 더욱 윤택한 언어 생활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말과 글은 주어가 목적어를 하게 하는 것을 기본 구조로 파생한다. 그래야 목적과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p.120)
누군가의 생각이나 마음을 알고 싶다면 갖지도 않은 독심술을 부리지 말고 말(글)을 건네자. 그 말(글)이 가진 힘을 믿자. 우리가 어휘력을 키우고 싶은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 소통에 있지 않던가.(p.133)
공감능력을 갖춘 이들은 어휘 선택과 태도에 신중하다. 남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어휘' 따위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주효한 거름이 될 수 있다.(p.138)
어휘력은 감정과 말, 행동을 해석하고 싶은 욕구만큼,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만큼 는다.(p.144)
인생은 단순치 않아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못하다고 계속 못하라는 법 없고 반대로 낫다 해서 계속 나아지라는 법도 없다. 반세기를 사는 동안 깨우친 게 있다면 누군가의 오늘을 보고 함부로 내일을 예측하지 말자는 것이다.(p.152)
쉽게 하는 말은 쉽게 타인의 영혼을 짓누른다. 과정에 공감하고 노력에 감동하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듣는 이의 영혼을 환하게 밝혀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게 해준다.(p.153)
엄벙하다; (자동사) 일을 건성으로 하여 남의 눈을 속이는 태도를 보이다. (형용사) 말이나 하는 짓이 착실하지 못하고 실속 없이 과장 되어 있다.
깜냥; (명사) 스스로 일을 헤아림, 또는 헤아릴 수 있는 능력.
꺼벙이; (명사) 성격이 야무지지 못하고 조금 모자란 듯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자발없다; (형용사) 행동이 가볍고 참을성이 없다.
남세스럽다; (형용사) 남에게 놀림과 비웃음을 받을 듯하다.
엔간히; (부사) 대중으로 보아 정도가 표준에 가깝게.
번죽;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도나캐나; (부사) 하찮은 아무나. 또는 무엇이나.
변죽; (명사) 그릇이나 세간, 과녁 따위의 가장자리
부아; (명사) 분한 마음
불뚝거리다; (동사) 무뚝뚝한 성미로 갑자기 자꾸 성을 내다.
아망스럽다; (형용사) 아이가 오기를 부리는 태도가 있다.
고갱이; (명사) 풀이나 나무의 줄기 한가운데에 있는 연한 심. 사물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깨끔하다; (형용사) 깨끗하고 아담하다.
태깔; (명사) 모양과 빛깔.
까끄름하다; (형용사) 편안하지 못하고 불편한 데가 있다.
슴벅슴벅; (부사) 눈이나 살 속이 찌르듯이 자꾸 시근시근한 모양.
무지무지; (부사) 몸시 놀랄 만큼 대단히, 몹시 거칠고 우악스럽게
덜름하다; (형용사) 입은 옷이 몸이 비하여 길이가 짧다.
잡도리; (명사) (잘못되지 않도록) 엄중하게 단속함.
해찰하다;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다.
외수없다; 예외 없거나 틀림없다.
허천하다; (사람이) 몹시 굶주리어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다.
뱃구레; 사람이나 짐슴의 배 또는 배 속을 속되게 이르는 말.
군입정; (명사) 때 없이 군음식으로 입을 다심.
눌은밥; (명사)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
누룽지; 눌은밥의 비표준어
냇내; (명사) 연기의 냄새
쟁이다; (동사) 물건을 차곡차곡 포개어 쌓아두다.
흐무뭇하다; (형용사) 매우 흐뭇하다.
옹골지다; (형용사) 실속이 있게 속이 꽉 차 있다.
쇠다; 채소가 너무 자라서 줄기나 잎이 뻣뻣하고 억세게 되다.
슬다; (동사) 식물이 습기로 물러서 썩거나 진딧물 같은 것이 붙어서 시들어 죽어가다.
지스러기; (명사) 골라내거나 잘라 내고 남은 나머지.
째마리; (명사) 사람이나 물건 가운데서 가장 못된 찌꺼기.
해낙낙하다; (형용사) 마음이 흐뭇하여 기쁜 기색이 있다.
잠포록하다; (형용사) 날이 흐리고 바람기가 없다.
어둑발; (명사) 사물을 뚜렷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빛살.
새물내; (명사)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얕은맛; (명사) 진하지 않으면서 산뜻하고 부드러운 맛. 산뜻하고 싹싹하여 부드러운 맛.
콘텍스트에 기대지 않는 텍스트란 존재할 수 없으니 콘텍스트가 먼저다. 문 닫고 나가라는 등의 맥락 닿지 않는 소리가 통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말뜻과 말맛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말맛이 우선이다. 사람은 말의 뜻보다 맛에, 텍스트보다 콘텍스트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p.176)
강하고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선을 집중시킨 후에 낯선 소재라면 익숙한 비유로, 익숙한 소재라면 신선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마지막에는 메시지를 담거나 여운을 남긴다.(p.184)
글을 가장 쉽게 쓰는 방법은 말을 받아쓰는 것이다. 여기에 주어와 시점만 잘 챙겨도 웬만한 문장은 완성할 수 있다. 한 문장이 길면 또 주어와 시점이 헛갈리니 짧게 쓰는 것이 낫다.(p.186)
주어는 문장의 주인이다. 다음 문장 주인이 앞문장과 같은 주인이면 거듭 챙기지 않아도 된다. 대신 일의 순서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동사와 형용사 등의 용언에 시제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p187)
우리말에서 부사는 용언 또는 다른 말 앞에 놓여 그 뜻을 분명하게 하는 품사지만 형용사는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품사로 동사와 함께 용언이다.(p.192)
언어의 세계에서도 승자독식이 있어 일정한 뜻을 전달할 때 같은 어휘만 주구장창 쓰는 경향이 있는데 비슷한 뜻을 가진 다양한 어휘를 활용하면 말과 글의 맛이 살아난다.(p.194)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으나 어떤 글이 못 쓴 글인지는 말할 수 있다. 수식어를 남발하거나 요란한 글은 못쓴 글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줏대가 없는데 있는 척해서다.(p.195)
계획대로 되지 않아 더 나은 발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마냥 운수에 맡길 노릇은 아니라 쓰다 막히고 늘어지면 소동파의 말을 경계로 삼는다. '아직 마음속 생각이 충분하지 않구나.'(p.199)
대학에 다니던 시절, 동기들과 수업 이동을 위해 캠퍼스를 거닐다가 리포트를 쓰는 방식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보통 마감 직전에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릿 속을 짜내듯이 내용을 고민한다고 했다. 대학 새내기로서 누구보다 즐겁고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과제를 최대한 뒤로 미루는 방법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마감 직전에 과제를 해치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룰 수밖에 없었던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리에 앉기 이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그동안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생활하다가 갑자기 특정한 주제의 리포트를 글을 쓰려면 생각을 전환하고, 해당 주제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거나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가지지 않고 마감시간을 지키기에만 급급하다보면 방향성도 뚜렷하지 않고 문장 속에서 길을 헤매는 듯한 해괴한 글이 완성될 가능성이 높다.
글을 잘 짓기 위해서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이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많이 생각하라고 해서 골방에 갇혀 특정 주제에만 골몰하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다양한 풍경, 사람들의 움직임을 마주하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샘솟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산책하고 여행하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추억뿐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사유의 기회 또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공간을 크게 바꾸고 몸을 크게 움직이면 생각도 바뀐다. (p.200)
구성이 잘못된 글은 있어도 구성이 없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p.205)
6하 원칙 중 어느 요소를 남기고 뺄지, 어느 것을 먼저 터트리고 나중으로 미룰지, 혹은 끝까지 숨길지 등을 선택하는 감각은 기본적인 문장 쓰기 연습으로 체득할 수 있다.(p.211)
6하 원칙은 기본적인 문장의 요소이자 구성인 동시에 글 전체의 구성이 된다. 모든 글은 하나의 명제로 시작해 여섯 가지 요소를, 혹은 그중 특정한 요소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전개되기 때문이다.(p.211)
그러는 동안 깨우친 사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를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도, 사고력을 확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p.215)
이러한 환경에서 자료와 근거가 빈약한 주장은 글쓴이의 게으름만 대변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부지런함과 유식함을 입증해보일 요량으로 방대한 자료와 근거를 취합해 나열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일기에 가깝고 후자는 글이 아니다.(p.223)
주요 어휘는 논지를 상징하는 주제어로부터 뻗어나가며 무엇보다 수신자에게 의미가 닿아야 한다.(p.234)
발신자와 수신자의 심리적 거리를 조절하는 주도권은 주어가 쥐고 있다. 수신자는 문장의 주어가 자신과 어떤 상관인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조절하고 결정한다.(p.234)
써야할 말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쓰지 않아도 될 말을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 더불어 전하고 싶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뛰어넘어 과감하게 변칙과 파격을 시도하는 모험이 필요하다.(p.239)
필요한 말까지 생략하면 선문답처럽 난해해진다. 어떤 어휘를 끝까지 남기고, 어떤 어휘를 과감하게 생략해 수신자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보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p.242)
숫자가 기업 수익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진 반응 미디어를 손에 들고 있는 한 사유, 추론, 음미, 상상, 사색 등이 끼어들 틈은 없다. 내면에 집중할 시간을 스스로에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소리다.(p.250)
책을 많이 읽으면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만한 문장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우리는 책 말고도 다양한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같은, 이제는 올드 미디어가 되어가고 있는 매체와 더불어 SNS나 각종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하여 새로운 소식을 접하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뉴미디어 시대에서 책이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앞서 말한 매체나 SNS 등은 그 내용이 직감적이고 자극적인 '반응 미디어'로서, 사용자들이 플랫폼에 체류하여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콘텐츠 속에서 사용자는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힘들며, 콘텐츠가 담고 있는 일방적인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콘텐츠를 제작한 거대 기업이나 플랫폼에게 사고를 '조종'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매체들과 달리 책의 경우 저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분석해보거나 문장에 담긴 의미에 대해 깊이 음미하고 사색해 봄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물론 SNS 상에서도 많은 양질의 콘텐츠가 제작되어 유포되고 있고, 책 중에서도 특별히 배울 점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급한 책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화 하기는 어렵지만, 어떠한 콘텐츠를 접하던 간에 충분한 '사유, 추론, 음미, 상상, 사색'의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자극적이고 거짓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중심축을 만들어준다는 것 만큼은 자명해 보인다.
나의 관점과 남의 관점이 같이 즐겁게 놀다 팽팽하게 긴장하다 격렬하게 맞부딪친다. 깨져서 깨치거나 하나가 된다. 이후의 나와 이전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무한한 나의 내면에 새로운 세상 하나가 창조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 읽기의 고유성이다.(p.254)
내가 책을 읽는 콘텍스트는 대략 이러하다. 왜 이 시점에 이 책이 세상에 나왔는가. 대상과 사물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가. 세련된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한 구절은 무엇인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연관돼 있는가.(p.258)
콘텍스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너머가 궁금할 때가 있다. 읽은 책을 징검다리 삼아 저자의 다른 책, 저자가 영향 받은 책, 같은 주제를 담은 다른 저자의 책,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나 문화 관련 책 등으로 건너간다.(p.259)
고정된 정의에서 벗어나 보는 방식이 달라지면 어휘의 쓰임새가 달라진다. 어휘의 쓰임새가 달라지면 의식의 세계가 커지고 깊어진다.(p.269)
몇년 전,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기 전에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면허가 있는 상태라도 바로 운전을 하는 것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꼭 연수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꼭 강사님께 수업을 듣지 않더라도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친절하고 자세하게 운전을 알려주는 영상들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수를 듣고난 이후 여러 해 동안 운전을 하고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때 연수를 들었던 것에 대해 후회를 하지 않는다. 지금도 운전을 할 때면 상황에 따라 강사님께서 지도해주셨던 것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영상을 통해 배운 것들은 내가 직접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지만, 강사님께 직접 연수를 받은 기억은 운전의 기술적인 측면과 나의 경험이 어우러져 오랜 시간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음미하면 친숙해진다.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 시간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있는데 음미하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주인인 나의 시간이다. 낱말을 뒤살피고 음미하면 뇌의 뉴런이 새로운 연결망을 생성한다. 그 낱말에 어울리는, 혹은 너무 어울리지 않아 아이러니한 경험이나 생각이 떠오른다.(p.273)
나는 '운전연수'의 교훈을 통해, 기억은 경험과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장을 읽고나서 '어휘력'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번 장에서 '아름답다', '짓다', '먹다', '놀다'라는 낱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보며 어휘가 가진 다양한 쓰임새를 '음미'했다.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낱말의 의미를 암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물론 기억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암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낱말의 여러 의미를 이해하고, 상황에 따라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으려면 무조건적인 암기보다는 해당 어휘에 들어 있는 "뜻과 맛, 넓이와 깊이를 음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시간'을 사용하여 경험하고, 음미한 어휘는 오래도록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음소 한 개를 파고드는 게 어휘력의 광맥이 될 수 있다.(p.297)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p.309)
인간에게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알레고리와 메타포, 눈치와 유머라는 언어의 거대한 산맥을 A.I.가 어떻게 넘어설지 궁금하다.(p.311)
로봇이 사람처럼 되는 것보다 사람이 로봇처럼 되려 하는 게,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무섭고 슬프다.(p.313)
당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맛은 무엇인가?(p.315)
진정성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나 글이 꼭 진정성있게 들리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어떻게 표현해야 상대가 참되고 올바른 성질이나 특성을 가진 것으로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한 고심은 늘 필요하다.(p.336)
대학 시절, 나는 동아리를 두 가지 정도 이끈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선택했던 운영 방식은 '1) 먼저 동아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를 명확히 파악하여 합리적이고 내실있게 운영하고, 2) 우리 동아리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깔끔하고 정갈하게 홍보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동아리 운영뿐만이 아닌 홍보에도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화려하게 알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활동을 주변에 알리려는 노력을 통해 하나의 단체로서 우리들만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구성원들을 모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이 이러한 노력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사상이 있으며 세계관과 철학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어도 듣기 쉽게 정리하여 말하지 못하면 공감하기 어렵고, 설령 훌륭한 철학이 담긴 글이어도 읽는 사람 입장에서 설득력있게 저술하지 못했다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각 문화권마다 서로의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언어를 통한 표현이 의사소통의 중심이 된다. 우리에게 표현 능력이 필요한 이유이며, 그 능력의 바탕이 되는 어휘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사람은 머리로 안다 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하지 않는다. 내용인즉 아무리 옳아도 가슴을 울리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가슴만 둥둥 울려댈 뿐 머리에 닿지 않으면 개꿈처럼 공허하다.p.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