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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EATS Oct 13. 201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호메로스 『일리아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잔망스러울 정도로 감정적이다. 많이 알려진 제우스의 비도덕적 여성편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신들도 서로의 감정싸움에 인간을 끼워 넣고 재미를 보기도 한다. 호메로스가 그려낸 신들도 다 그렇다. 애초에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것도 신의 질투(파리스의 심판)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펠레우스와 테티스 혼례를 축하하는 신들의 향연> 코르넬리스 판 하를럼(1593)


동양의 신은 무릉도원에서 유유자적 복숭아나 먹고 술이나 마시는데, 이 서양 신들은 툭하면 인간사에 개입을 한다. 일리아스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자신이 던진 사과 때문에 벌어진 이 모든 일을 구경하며 10년간 얼마나 재미를 보았을까. 인간을 자신들의 놀이판에 올려놓고 훈수를 두는 꼴이다. 일리아스의 신들은 때때로 실수를 하거나 인간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 서로 질투하고 현혹하고, 현혹당하는 것은 기본이다. 용맹한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하고 비열한 인간의 행동에는 분노하기도 한다. 절대적인 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얼마나 인간적인 신인가.


반면 트로이 전쟁을 이끌어가는 인간 영웅들은 비인간적이다. 욕심 많은 권력자 아가멤논, 부모가 보는 앞에서 그 자식의 시신을 훼손하는 아킬레우스,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결정 내리지 못하는 방관자 헬레나. 그리고 모든 사건의 시작, 파리스의 헬레나 납치. 파리스가 남의 것을 탐한 것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되었다. 파리스는 사랑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자신의 나라가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것을 묵인한다.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아킬레우스는 주인공이라 그런지 비인간적인 면모마저 단연 독보적이다. 심지어 신들마저 '마음에 분별이라는 것이 없고 사자처럼 흉포한 인성을 가진 오만한 인간'이라 말할 정도이다.


이렇게 신은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반대로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게 느껴진다면, '비인간적'인 것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노조를 탄압하는 회사,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 무분별 테러 등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비인간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건을 비인간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크게 반감을 갖는 경우도 없다.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사용할 때 고민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희한한 단어이다.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인간적인'것의 기준이 있기라도 한 걸까.


도덕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면 편하지만,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마저 자신의 감정에 동요하며 무자비한 잔혹함을 보여주거나 실수를 하는데 10년째 전쟁을 겪는 인간에게 얼마나 고결한 도덕을 요구할 수 있을까. 도덕적인 것이 무엇인지 규정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점도 있다.


호메로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도덕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덕성을 제외하고 '인간적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일리아스를 읽으며 나는 어떤 순간, 어떤 인물에게서 인간적임을 느꼈는가. 호메로스가 그려놓은 인간상은 너무도 입체적이어서 하나의 인물이 어떨 때는 인간적이었다가 어떨 때는 그렇지 않다. 그래도 고르라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으로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체를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를 만나는 순간을 꼽고 싶다.


영화 「트로이」중 (좌)프리아모스 / (우)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는 주인공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일리아스의 등장인물 중 가장 크게 변화하는 입체적 인물이다. 작품의 끝자락까지 아킬레우스는 본인이 쥐고 있는 것들만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브리세이스를 빼앗겼을 때 분노하고 전쟁에서 발을 뺀다.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순간에도 아가멤논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쟁에 다시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다.


이색적인 점은 아킬레우스의 등판이 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계기는 되었지만, 그가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계기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도 아킬레우스는 훼손된 명예와 자신의 것을 잃었다는 분노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아킬레우스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아닌, 적의 수장 프리아모스 왕이다. 프리아모스 왕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들어간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적군의 장수 아킬레우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여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았다. 이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에게 자비를 베풀고 프리아모스는 신세를 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내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영웅적 미담에 간략히 거론되고 말기엔 아쉬운 인물이다. 아들을 잃은 늙은 아비의 진정성이 전달되는 순간 아킬레우스는 그를 이해하고 인간적인 인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인간성을 회복할 기회를 준 사람이다. 그를 통해 아킬레우스는 타인을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나누는 기준은 '타인의 상태에 대한 공감능력의 여부'이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삼장법사를 만나지 않은 제천대성처럼 철부지 장수로 살다 죽었을지 모른다. 프리아모스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트로이의 마지막 왕이고, 삼장법사는 빈손으로 서역만리를 떠나야 하는 고행자이다. 두 인물 모두 특별한 능력이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신들도 인정하는 용맹함을 지닌 반신(半神)이고, 제천대성은 천지를 경계없이 오가는 불사의 존재이다. 둘은 이미 위대함에서는 견줄 바가 없는 압도적 강자이다.


아킬레우스와 제천대성, 그들이 혼자였다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두 인물은 작중의 가장 나약한 존재로 인해 변화하고 성장한다. 이렇듯 보잘것없는 인물이 주인공(강자)에게 영향을 미치며 필수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고전 서사시의 흔한 플롯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그려넣은 나약한 등장인물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메로스와 오승은은 나약한 인간에게 주인공의 내면에 무언가를 채워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부여한다. 바로 공감능력과 인간성이다. 두 저자는 영웅의 활약이 주는 재미만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인간이 갖추어야 할 아주 기본적인 필요조건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뛰어난 능력과 기개를 갖추었더라도 공감능력과 인간성이 없다면 결코 영웅, 아니 인간조차 될 수 없다고 말이다.


우리는 지금 큰 영웅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웅을 갈망하고, 스스로 아킬레우스가 되길 원한다. 개인의 집합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각자의 삶 자체가 전쟁이라 그런 것일까. 영웅이 나타나 나를 구제해줄 필요가 없으니 스스로 아킬레우스의 조건을 갖추려 한다. 최고의 스펙과 나를 빛내줄 갑옷을 열망한다. 늘 중요한 인물로 거론되길 원하고 타인의 좋은 평가를 갈구한다.


우리는 개개인의 전쟁에 갇힌 채 타인을 돌아보지 않으며, 변화하기 전의 아킬레우스만을 우러러보고 있진 않은가. 아킬레우스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 계기는 프리아모스의 아픔에 공감하고 관용을 베푼 순간이다. 아킬레우스가 시대를 넘어 현재까지도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공감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성의 회복'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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