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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EATS Oct 11. 2019

거짓말쟁이의 목을 조르는 법(1)

베티나 슈탕네트 『거짓말 읽는 법 』

척추가 공손하게 휘어버린 덕분에 매주 도수치료를 받는데, 오늘 물리치료사분이 집에서 운동 잘 하고 있냐고 물었다. 간사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매일 자기 전에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어깨 한 번 만져보면 바로 들통 날 텐데! 예상과는 달리 치료사 선생님은 어깨가 꽤 말랑말랑해졌다고 잘 하고 있단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만 선생님을 속인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직 왼쪽 어깨는 많이 뭉쳐있으니 이러이러한 운동도 더 하라고 알려준 게 핵심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질긴 승모근을 만지자마자 ‘이 놈 거짓말 하고 있구나! 하지만 내가 속아주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대신 속는 척 하며 또 다른 숙제를 준 것은 아닐까? 


이제 나는 정말 운동을 해야 한다. 안하면 다음 주에는 정말 들통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자기 전 운동을 한다.’라는 내가 만든 거짓 세계에 꼼짝없이 나만 걸려들었다. 선생님은 나의 거짓말을 받아치지 않음으로써, 속아줌으로써 이겼다.

     

평소 같으면 이런 거짓말은 하는 순간부터 하고 난 다음까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이게 다 이 책 때문이다. 베티나 슈탕네트의 『거짓말 읽는 법』 


이 책은 얼마 전 이진우 교수가 쓴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를 읽다가 한 가지 납득가지 않는 점이 있어 이것저것 찾아보다 선택한 책이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 개념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명령을 사유(思惟)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말이 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100% 납득할 순 없었다. 실제 실험을 통해 무사유가 악한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내 궁금증은 ‘아이히만의 말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냐’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감형을 받기 위한 술책으로 그런 진술을 한 것이라면?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베티나 슈탕네트는 ‘악의 평범성’은 일면일 뿐이고, 악은 고도의 계산을 통해 이뤄지는 행위라며 한나 아렌트를 정면으로 반박한 책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Eichmann vor Jerusalem(2011)』의 저자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저자의 책 『거짓말 읽는 법』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거짓말의 본질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현실에서 진실을 가리는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 치부하며 외면해버린 그간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진실의 부재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해야 할 하나의 인식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거짓말의 생성과정, 생성조건, 목적, 작용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군데군데 다시 되돌아가 읽어야 할 만큼 어렵다가도, 덧붙인 일상의 예시를 들어보면 또 쉽게 이해되는 매력이 있다. 거짓말은 거짓말하는 사람 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일 상대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거짓말은 본질적으로 대화의 성격을 띤다. 거짓말은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상대방의 생각을 훔치고 그 자리에 거짓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거짓말은 완성된다. 그렇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가두어 권력을 손에 쥐고자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신 역시 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짓 세계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일방적인 가해자이며 속는 사람은 억울한 피해자로 여긴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주체를 떼어놓고 거짓말 그 자체의 뿌리부터 파헤쳐가다 보면 거짓말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거짓말을 하나의 소통 수단으로 본다면 사회와 타인을 보는 시선의 영역이 넓어질 수 있다. 거짓말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속일 의도가 있는 사람보다 거짓말을 잘 아는 것뿐이다. 거짓과 거짓말, 거짓말하는 사람으로부터 진실의 영역을 수호하는 것은 결국 거짓과 거짓말, 거짓말하는 사람을 얼마나 잘 아냐에 달렸다. 

 

이 책에는 나치즘과 아이히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릇된 제도를 활용해 자국민에게 총칼을 겨눈 수많은 거짓말쟁이들의 거짓말. 아픈 역사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느냐만, 독일은 우리나라의 처지를 떠올리게 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독일은 역사에 지은 과오를 직면하고 성찰함으로써 사죄하고 있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 개념을 구축한 한나 아렌트와, 그런 한나 아렌트의 판단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 베티나 슈탕네트를 보며 독일이 부럽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우리도 일반적인 생각으로 납득할 수 없었던 수많은 변절자와 정치인들의 언행을 분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더라면, 더 많은 거짓말쟁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막는데 조금은 일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이 안전하다는 위장 방송을 하면서까지 몸을 숨겼던 이승만,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4번이나 번복한 박정희, 무고한 광주 시민을 잔혹하게 학살해놓고 자신과는 무관하다며 발뺌한 전두환 같은 거짓말쟁이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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