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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EATS Oct 11. 2019

독서도둑은 누구인가(1)

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 빼앗긴 독서


독서의 계절 가을이 성큼 들어섰다. 이 말은 안 그래도 팔리지 않는 책이 가을이면 더 안 나간다기에 하는 소리라는 출판종사자들의 푸념도 있지만, 그런 슬픈 현실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가을이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밤이면 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책을 열장 남짓 뒤적이기만 해도 내가 낭만독자가 된 것만 같다. 잔잔하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한여름 매미소리와 달리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백색소음이 되어 귓가를 스쳐가는 것도 좋다. 


아니, 좋았다. 


나는 분명 학창시절에 비하면 독서의 기쁨을 잃어버린 느슨한 독자가 되었다. 『해리포터』시리즈를 반복해 읽으며 마법 주문이 주는 설렘을 느끼던 초등학생 시절도 지났다. 새벽에 스탠드만 켜놓고 『샤이닝』을 읽을 때의 짜릿함도, 책 읽는 모습이 간지날 것 같아서 『상실의 시대』를 들고 다녔던 것도 고등학교 때 이야기다. 


그래도 종이책은 여전히 낭만 그 자체여서 아직도 책을 못 놓는다. 책을 읽다가 새벽에 잠들면 후회하지 않는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다 새벽을 맞이하면 그렇게 스스로가 한심할 수가 없다.


그런 불성실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요즘 아이들은 참 책을 안 읽는다.


아, 내가 벌써 꼰대가 되었나. 


90년대 생은 부모님으로부터 TV랑 컴퓨터 때문에 책을 안 읽는다는 잔소리를 들었는데, 밀레니엄 세대 아이들은 스마트폰 때문에 같은 잔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럼 우리 이전의 어른들은 무엇 때문에 책을 안 읽는다고 잔소리를 들었을까. 아니, 듣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들에게 독서는 억압의 시대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휴식처이자 유토피아였을지 모른다.


‘책따’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요즘 아이들에게야 책이 근사한 미디어는 아닐지 몰라도, 어른들의 향수에는 책이 빠지지 않는다. 왜 옛날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그런 장면 하나쯤 있지 않나. 한쪽 팔에 책을 끼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시선을 빼앗기거나 창틀에 앉아서 철학책을 읽는 남자 선배에게 설레는 장면들.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돌려 읽으며 해외 소설과 사상으로 영혼의 충만함을 느꼈을 시대. 신문에 연재되는 『토지』나 『별들의 고향』을 읽는 것이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었을 시대. 


(좌) 월간지 <문학사상> (출처:문학사상사)


그렇게 그들에게 책은 청춘의 한줄기에 늘 함께하는 친구이자, 사유의 뒷받침이었을 것이다. 책과 사상이라는 안식처는 그들에게 사회 내부의 모순과 억압을 통찰하는 힘을 기르게 했고, 이는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용기에 불씨를 붙이는 데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야만의 시대에 낭만을 잃지 않도록 그들을 버티게 해 준 힘, 그 자체가 책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부모가 되어 자녀에게 “책 많이 읽어라!” 잔소리를 하는 이유도 책을 읽은 사람들이 더 똑똑하고 멋져 보일뿐 아니라, 독서를 통한 지적 충만이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는 맹목적 믿음마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에게 책을 읽으라는 기성세대의 잔소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진심어린 걱정과 조언일 수 있다. 문제는 어른들이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서 독서를 빼앗아간 주범을 디지털매체로 보는 것이다.



독서도둑은 과연 누구일까? 


이번 서평의 주인공 『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는 뉴미디어의 범람이 독서량 저하에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하지 않지만, 독서도둑이라 부를 만큼 극단적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과 뉴미디어의 공존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독서도둑’을 잡는 것은 한국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나라 독자와 어른(부모)들이 추가적으로 고민할 몫이다.



나는 독서도둑으로 한국교육을 지목한다.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인가, 독서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가져본 적 없는 것인가. 유년기에는 가정에서 스마트폰 공갈젖꼭지를 물려 아이들을 키우고, 학교에서는 독서 교과목으로 아이들에게 독서를 ‘가르치고’ 있다. 논술조차 공식대로 습득하라고 하고 있지 않나. 문학 작품 한 권을 읽는 것보다 그 작품에 담겨진 저자의 의도와 작품의 의의만을 배우라 하지 않는가. 지름길은 결코 왕도가 될 수 없는데, 독서마저도 속도에 맞춰 ‘배우라’하는 한국교육이 결과적으로 아이들로부터 독서를 앗아가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분명 똑똑하다. 알고 싶은 것, 읽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던 과거의 세대들과 달리 모든 정보를 10분 이내에 찾을 수 있는 검색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인터넷은 무수한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똑똑해진다고 마냥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섭취하고 있는 텍스트가 단지 지식의 축적에 그칠지, 지혜로의 확장까지 이어질 지 살펴보고 고민해야 한다.

   

한국교육은 독서를 교육의 범주에 넣어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이는 아이들에게서 독서 그 자체를 빼앗은 것 뿐 아니라, 기성세대가 누려온 독서의 낭만과 기쁨을 맛 볼 기회마저 빼앗아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독서를 배우고 있으니, 기성세대는 ‘요즘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라며 혀를 찬다. 아이들은 진짜 독서는 강탈당한 채 가짜 독서, 겉핥기 독서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식 교육이 만들어 낸 내부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이들은 독서의 낭만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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