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를 마치며

현대식 전통 혼례

by 장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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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여성은 남편을 따라 '시집'을 가면 한평생 친정 나들이조차 어려운 제한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모계 사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의 오랜 혼습은 남성이 처가로 '장가' 드는 것이었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이라 불렀다. 조선 건국 후, 성리학자들은 결혼 풍습을 가부장 중심으로 고치려 했다. '주자가례'의 혼례 예법인 '친영례'에 입각해 여자가 시집을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활 저변에 뿌리내린 혼례 풍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조선 중기 '반친영'이라는 절충안까지 등장했지만 서울의 일부 사대부 가문에서 행해졌다는 기록만 있을 뿐, '친영례'는 정착되지 못했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큰 전란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는 신분 질서가 요동치고 있었다. 위정자들은 유교 이념을 교조화시켜 확대 재생산하며 사회 질서를 견고히 다지려 했다. 가부장제를 앞세운 변질된 유교의 전통이 뿌리 내린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결혼 풍습 또한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가부장 중심의 '친영제'로 정착되어 갔다.


여자가 시집을 가는 친영의 혼례 풍습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유효한 전통이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까지 이어져 내려왔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 조차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싶다. 현대 사회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들지 않는 부부의 온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수 천년 간 내려온 자식 사랑의 종착지는 어느 곳으로 향할지, 자식을 하루라도 더 품고자 하는 부모의 애틋한 사랑의 줄다리기는 어떻게 흐를런지, 사뭇 궁금해진다.




참, 고양이들은 무사하다. 화초는 일주일 넘게 한옥을 밝혔고 나미 매듭 사이의 모란도는 그 해 한옥의 여름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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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상에 놓았던 대나무 밑동으로 뿌리가 돋았으며 폐백 상의 대추와 밤은 그대로 냉동실에 들어간 뒤 화석이 되었던 듯싶다.




혼례복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만, 미련이 남아야 애틋함이 커지지 않겠나. 우리의 것, 전통에 대한 갈망 말이다.